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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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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한민족의 대외 파병 역사(중) (국방일보)



제목 : 한민족의 대외 파병역사 (중)

저자 : 군사사부 선임연구원 서인한

수록 : 국방일보,2002.02.01


15세기 후반 조선의 여진 정벌군 파병

c조선이 15세기 후반 무렵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여진족 집단은 건주(建州)여진·해서(海西)여진·야인(野人)여진이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중심으로 수렵·어로 및 농경에 종사하면서 통합과 분열을 반복해왔다. 특히 야인여진은 파저강(婆猪江)과 두만강 유역의 우랑카이부족, 함경도 회령 일대의 우도리부족, 목단강·수분하 일대의 우디거부족으로 크게 분리되어 있었다. 한민족과 가장 근접한 지역에서 생활하면서 복종과 배신을 반복하는 집단으로서 조선은 이들을 포함한 여진부족 전체를 ''야인''이라 통칭하면서 야만시하였다.
c 그 중에서도 우도리족과 우디거족은 국경 지역에서 약탈을 자행하는가 하면 무력 침공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대한 적극적인 강경정책으로 채택된 것이 15세기 후반의 대규모 정벌군 파병이었다. 당시 조선으로서도 1460년(세조 6)에 함길도 도체찰사 신숙주(申叔舟)가 5천여 명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한 후로 재출병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기는 하였다. 이 무렵, 여진족이 요동 침공을 단행할 것이라는 첩보를 1467년(세조 13) 2월에 입수하고, 그해 8월에 명나라 요동도사의 요청에 이어 9월에는 명으로부터 정식 요청을 받았다.
c이에 조선은 중추부 지사 강순(康純)을 사령관으로 하고 어유소(魚有沼)와 남이(南怡)를 부장으로 삼아 정벌군을 파병하였다. 이들은 압록강 중류 만포에서 파저강으로 진격하여 추장 이만주(李滿住)와 우두머리급 24명을 포함한 3백여 명과 우마 230여 마리를 참살함으로써 여진족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나 이 파병은 명과의 외교관계상 비밀리에 추진되었으므로 파견부대 규모가 1만여 명 정도라는 것 외에는 그 내막이 베일에 싸여진 출병이라는 특징이 있다.

c이러한 상황은 1479년(성종 10)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명의 요청에 의해 건주위를 정벌하기 위한 파병부대 편성이 거론되던 윤10월에 반대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1만여 명의 파견부대를 편성하였으나 압록강이 결빙하지 않은 관계로 되돌아 왔다. 파병부대의 재편성이 다시 거론되자 반대 여론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 찬반론으로 대립하였다. 결국 대명 외교의 중요성에 인식을 같이 하면서,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을 평안도 도원수로 하고 김교(金嶠)를 부원수로 삼아 국경수비대 1천명을 파병하였다. 11월에 출병한 부대는 약간의 전과를 거두고 별다른 피해없이 12월에 복귀하였다. 특히 이 파병은 중신들의 강력한 반대와 명의 요청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양측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범위내에서 매우 형식적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17세기 전반 조선의 후금 정벌군 파병

조선은 건주여진의 누루하치(奴兒哈赤)가 17세기 전반에 여진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 大金:1616)을 건국한 후로는 후금과 명(明)의 대립구도 속에서 국익을 위한 정치적 선택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금은 1618년부터 여진족의 ''칠대 원한(七大恨)''을 갚는다는 명분아래 만주의 요충인 무순(撫順)과 청하(淸河)를 차례로 점령하면서 명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에 명은 대규모 토벌군을 편성하는 한편 조선에 서신을 보내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의 명군 지원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파병을 요청해왔다. 앞서 임진왜란의 위기 상황에서 명군의 도움을 받았던 조선은 명의 지원군 파병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당시 조선은 쇠퇴하는 명과 신흥 강국 후금이 중원의 패권을 다투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이 끝 난지 20년도 지나지 않아 여전히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또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에 국왕 광해군(光海君)은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려고 했다. 명의 계속되는 외교적 압박과 조정 중신들의 파병 주장을 뿌리치지 못한 광해군은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는 파병 방안을 강구하기에 고심했다. 이 때문에 광해군이 파병 직전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에게 모종의 밀명을 내렸다는 의혹이 오늘날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출병부대는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의 지휘하에 15,500명으로 편성되었다. 문관 출신의 강홍립을 사령관에 임용한 것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명나라 장수들과의 교류가 용이하고, 이를 통해 전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고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군이 1619년 2월에 만주 지역에 진입하자 명장 유정(劉綎)은 감독관을 파견하여 강행군을 독촉했다. 산악지형과 험로를 통과하는 10여일 간의 강행군으로 흥경(興京) 근교인 심하(深河)에 도착한 조선군은 극도로 지쳐있었다. 이때 명군 주력이 후금 철기군(鐵騎軍) 3만 명에게 유린되자 조선군도 화포(火砲)를 쏘면서 대응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닥친 모래 강풍 때문에 화포 사격이 불가능해지자 무려 9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말았다.
이때 후금군이 조선군측에 사자를 보내어 서로 원수진 일이 없으니 화해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부원수가 후금 진영에서 화약을 맺음으로써 조선군은 인력손실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후로 명의 조선군 재출병 요구가 계속되었으나 심하전투를 핑계로 더 이상 파병하지는 않았다. 이 파병은 심하전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후금의 보복적 침공을 차단하였으며, 국왕 광해군과 그 지지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크게 강화시켜 준 결과가 되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17세기 후반 조선의 러시아 정벌군 파병

c조선은 명과 후금의 전쟁에 중립을 시킴으로써 국정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23년에 광해군을 밀어내고 집권한 인조(仁祖)가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급선회하면서부터 후금과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급기야는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군신맹약(君臣盟約)으로 치욕적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후로 조선은 여진족에게 복수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면서 북벌계획을 세워 군비를 확충해 나갔다. 특히 효종(孝宗)의 북벌 준비로 조선군의 전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 북벌의지가 고조되던 17세기 중반에 러시아(羅禪) 세력이 흑룡강(黑龍江) 일대 주요지역에 성채를 구축하여 요새화하는 등 적극적으로 동방진출을 시도하자 변경지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청은 이러한 러시아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더 이상 군사력이 증강되기 이전에 후환을 없애려고 조선에 정예부대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이 이를 수용하여 1654년 5월에 함경도 북우후(北虞侯) 변급(邊及)을 사령관으로 삼아 정예 조총병(鳥銃兵) 1백 명을 포함한 152명을 파병하였다. 이들은 도중에 청군 9백여 명과 합류하여 송화강 연안에서 러시아 군과 접전하였다. 매복 전술로 4백여 명의 러시아 군에 기습공격을 가하여 청군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그해 8월에 전원 무사히 개선했다. 그 후 1654년과 그 이듬해에 청군이 연전연패하자 다시 파병을 요청해 왔다. 조선은 1658년 5월에 함경도 병마우후(兵馬虞侯) 신유(申瀏)에게 조총병 2백 명을 포함한 265명과 3개월 분의 군량을 자급하면서 청군을 지원하게 하였다.

c그해 6월 초순에 영고탑(寧古塔)에서 청군과 합류하여 7월 초순에 흑룡강에서 러시아 군과 접전하였다. 제2차 파병 사령관 신유 장군은 조선군이 소형 선박으로 러시아 군의 사격을 유도하여 실탄을 소모시키고, 청군은 비밀리에 전선들을 묶어 화공(火攻) 준비를 갖추도록 전략을 세웠다. 이에 조선군은 북풍이 불 때 러시아 전선에 불화살을 집중하여 대소 전함 10여척을 불태우고, 함대 사령관이 전사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군도 전사 8명과 부상 25명의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의 제2차 파병 기간은 약 4개월이었으나 실제 전투는 4∼5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으로써 조선군의 뛰어난 전투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한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은 청의 주변 정세와 청군의 전력을 탐지하였으며, 북벌의 선봉이 될 장병들과 전력을 실전에서 검증해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효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북벌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선군의 노력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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