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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2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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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忠孝精神은 우리 民族 精神의 뿌리이다 (월간 忠孝)



제목 : 忠孝精神은 우리 民族 精神의 뿌리이다.

저자 : 군사편찬연구소장 하재평

수록 : 월간 忠孝


c 흔히 군대를 다녀온 사람을 보고 세인(世人)들은 입을 모아 "이제 사람됐네"라는 말을 한다. 이는 학생 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솜털이 아직 보송보송한 젊은이가 이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엿한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으로 변신한 것을 두고 이른 말일 것이다. 군대 생활은 단체생활, 계급의식을 통한 질서의식, 명령복종, 동료애, 충성심, 그리고 가족사랑을 배우고 실천하게 해 준 국민교육의 도장(道場)으로서 우리의 국민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c이러한 군대 생활 및 교육을 통해 한 젊은이가 오늘날 시민정신의 근간이 되는 忠과 孝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바로 한 청년이 태어나 겪게 되는 ''인생의 첫 시련기''인 군대생활일 것이다. 충효정신은 군대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면면히 내려와 내재되어 있는 것을 단지 스스로 깨닫게 해주데 있다. 이처럼 충효정신은 우리 민족 정신과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겠다.

c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반만년 역사동안 950여회의 외침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충효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정신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민족정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상무정신(尙武精神), 저항정신(抵抗精神), 자주·독립정신(自主獨立精神), 국토개척정신(國土開拓精神), 그리고 국민총화정신(國民總和精神)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c역사적으로 상무정신은 우리 민족의 기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용어이다. 상무정신은 무존문천(武尊文賤) 정신이 아니라 상무 즉, ''國防''을 중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상무정신이 우리 민족의 국방의식으로 성장했던 것은, 세계적 문호이자『25시』의 저자인 게오르규가 한반도를 대륙의 빛나는 귀걸이로 표현한 것처럼 대륙세력이나 해양세력이 탐내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민족은 고래(古來)로 무(武)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생존전략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c이러한 상무정신의 역사적 발현은 고조선에서부터 출발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벼슬이름에서 무사계급을 특별히 두어 국방의 책임을 맡겼던 데에서 찾을 수 있고, 또 중국이 우리 민족을 ''항상 말을 타고 큰 활을 사용하는 동이족(東夷族)''이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상무기풍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상무정신은 신라의 3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던 화랑도 정신에 이르러 최고 상승기를 이루었다. 이러한 화랑도 정신도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의 ''事君以忠''과 事親以孝''라는 덕목에 연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상무정신이 충만할 때, 국운도 융성했고, 아울러 국토도 확장되었다.

c민족저항정신은 의병정신(義兵精神)과 일맥상통한 말이다. 저항정신은 오늘날 우리 민족이 한반도를 생활권으로 하여 단일민족을 유지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저항정신은 의병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의병정신은 세계 역사상 우리 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순수한 이민족에 대한 민간 항쟁을 일컫는다. 의병이란 나라의 부름이 없어도 국민 스스로가 국가의 지원 없이 외적과 싸우는 순수한 백성들로 구성된 민병(民兵)들이다. 서양에서 말하는 민병과 우리의 의병이 다른 점은 서양의 민병은 시민이 중심이 되어 사전 조직된 준 군사조직인 점에 비해, 우리의 의병은 충효사상에 바탕을 둔 민초(民草)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지원 없이 오로지 무보수로 충효사상에 입각한 충의열사(忠義烈士)들의 집단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국·미국·스위스의 민병이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리고 스페인의 빨치산과는 그 개념부터 다르다 하겠다.

c우리 역사상 의병은 조선시대로부터 한국전쟁기 학도병에 이르기까지 외침이 있을 때마다 이에 맞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조선시대 임진왜란시 왜적에 맞서 싸운 ''임진(壬辰) 의병''을 들 수 있다. 그 후 호란(胡亂)이나 양요(洋擾) 등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마다 민족자존과 국가수호를 위해 자발적으로 의병들이 봉기하였으며, 일제의 강점기에도 해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면서까지 의병활동을 하여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는 등 대일항쟁(對日抗爭)의 선봉장에 나섰다. 이는 급기야 6.25때 국민총화정신으로 누란(累卵)의 위기에 있던 조국을 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c자주·독립정신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identity) 및 정통성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배달민족(倍達民族)을 상징하는 한민족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 민족이 하나의 민족으로 역사적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자주·독립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독립정신도 그 저변에는 국가라는 대상을 향한 충효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c자주독립정신은 고구려시대 이미 중국과 대등한 국가라는 점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연호(年號)를 사용한 것이나, 대외적으로 수 없이 많은 침략을 받으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주독립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고구려의 천리장성 구축,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한쪽 눈을 빼앗은 안시성 전투, 13세기 세계를 정복하여 서양인으로 하여금 지금도 ''황화''(黃禍)라는 용어를 낳게 하여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게 한 징기스칸의 몽골의 기세에 굴하지 않았던 고려의 대몽항쟁(對蒙抗爭) 정신이야말로 대표적인 자주독립정신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이는 근세에 와서 민족암흑기에 3·1독립정신으로 꽃피움으로써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는 이러한 ''3·1 자주독립정신''이 중국과 인도 국민을 깨우쳐 그들의 독립의식에 크게 영향을 준 한국을 ''동방의 햇불''로 찬미하여 헌시(獻詩)하였던 것이다.

c국토개척정신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의 멸망 이후 잃어버렸던 고구려의 광활한 옛 땅인 만주대륙의 회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5세기 광개토대왕으로 알려진 고구려의 영락(永樂)대왕 담덕(談德)은 철기병(鐵騎兵)을 이끌고 만주대륙을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던 영명한 군주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의 영광은 발해의 멸망으로 만주대륙을 상실하게 되자, KBS-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태조 왕건''이나 ''제국의 아침''에서 말하는 제국(帝國) 운운(云云)하면서 고토회복은 모두 이 잃어버린 만주대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조들은 고구려 이후에도 옛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여 국토개척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우리 나라의 국토개척정신은 미국의 개척정신과 비교가 될 수 있는데, 미국 개척의 상대는 주인 없는 땅이거나 소수의 인디언족이 차지하고 있는 땅을 지배해 나가는 과정이었던 비해, 우리 선조들은 당시 세계의 강대국 중국과의 힘겨운 싸움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나가는 피나는 전투의 결과였던 것이다.

c국민총화정신은 현대판 충효정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6.25때 북한의 기습남침을 받은 우리 나라는 엄청난 국가적 위기상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유엔군의 반격이 이루어지기 전, 마지막 남은 국토의 5%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최후의 사수(死守)를 외치며, 이 산하(山河)를 지켜낸 정신은 바로 국민총화정신이었다. 온 국민은 경각(頃刻)에 달린 조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어린 학생들은 소년지원병이나 학도병으로, 젊은이들은 자원입대를 통해 군대로, 장년층은 군의 노무자로, 그리고 심지어 여학생들도 전투 및 간호장교로 군에 들어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던 것이 불과 50년 전의 일로서 국민적 충·효가 그 바탕이 되었다.

c오늘날 이러한 충효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족정신이 국민성으로 승화되어 해방 이후 열악한 정치, 경제, 안보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를 선진국으로 진입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 최대의 위기였던 6.25를 극복하였고, 이후 자유우방에 빚졌던 자유평화의 무거운 짐을 ''자유의 십자군''으로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갚을 수 있었고, 나아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적 성공을 이루게 하였다. 특히 충효정신으로 이루어진 민족정신은 평생을 민족정신 함양에 힘쓰시다 중국의 여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신 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단재는 민족정신(민족혼)을 칼에서 가장 중요한 ''칼날''에 비유하여 민족의 자존과 민족저항정신을 일깨워 우리 민족의 대외투쟁사에 나타난 시대적·역사적 정신으로 계승시켰다. 이는 오늘날 서구의 시민정신으로 발전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승화·발전하는 계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대단히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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