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035
일 자
2003.07.20 19:25:59
조회수
2358
글쓴이
관리자
제목 : 남베트남의 패망과 역사적 교훈 (국방일보)



제목 : 남베트남의 패망과 역사적 교훈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일보, 2002.04.29


베트남인들은 매년 4월 30일을 ''베트남해방 기념일''이라고 부르며, 민족최대의 축제일로 기념하고 있다. 금년은 이른바 제27주년 기념일로 수도 하노이와 남부의 최대도시인 호치민(구 사이공) 등에서 다채로운 축제가 벌어진다. 그러나 이 날을 1975년 당시 남베트남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수도였던 사이공이 함락되고, 나라가 소멸된 ''패망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10월,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남베트남의 젊은 지도자 지엠(Ngo Dinh Diem)은, 호치민(Ho Chi Minh)의 북베트남 정부(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에 대항하여, 남베트남(Republic of Vietnam)을 건국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 결과 베트남은 새로운 남북 분단체제가 형성되었으나, 북베트남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남부의 ''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과 함께 ''남베트남의 전복을 시도''함으로써, 프랑스와의 전쟁에 이어 제2차 베트남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남베트남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자,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사고문단''에 이어 전투병력을 파병하여,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우방국에도 지원을 호소함에 따라 한국정부도 2개의 전투사단을 파병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남베트남 정부가 머지 않아 국내의 게릴라를 제압하고, "공산권의 동남아 진출을 저지하는 보루(堡壘)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줄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부가 의욕적으로 계획하였던 ''정착촌정책'' 등이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실적위주 전시행정 등으로 무리하게 추진되어, 민심의 이반을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에 지엠 대통령의 족벌(族閥) 독재정치에 의한 부패가 기승을 부리게 되어, 결국 지엠 일족(一族)은 1963년 11월, 군사 쿠데타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지엠정권이 무너지자, 1967년 9월 티우(Nguyen Van Thieu)가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 무려 열 번의 정권교체가 반복되었으며, 남베트남 정국은 혼미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들은 민생을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에만 몰두하게 되고, 군인들 역시 전선을 지키기보다는 사이공에서 이루어지는 권력의 변화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 그 결과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보다는 인맥과 금력에 의해 진급과 보직이 결정되고, 공권력의 부패와 전투력의 약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어 주민들은 정부를 믿고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반면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미국과 싸우는 중에도 중국 및 북한의 전투병력 파병제안을 거절하고, 오로지 베트남인에 의한 자주적 통일을 위해 헌신해 온 인물이었다. 또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그는 부정이라는 단어조차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청렴한 정치인으로, 1969년 9월 2일 79세를 일기로 그가 사망하였을 때 남겨진 유산이라고는 대나무침대와 책상, 그리고 애독하던 장서 몇 권이 전부였다고 한다. 또한 그의 조국애에 감동한 많은 남베트남 주민들조차도 검은 리본을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c이 같은 민심은 대규모의 군사력을 동원한 미국의 힘으로도 결코 거스를 수 없었다. 그 결과 1968년 1월 북베트남군과 NLF의 ''구정공세''를 계기로, 미국 내에서 전쟁반대 시위가 격화되자, 존슨정부는 평화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마침내 미국은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북베트남 및 NLF와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던 우방국의 군대를 포함한 모든 군대를 철수시키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베트남 전쟁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미군이 철수할 당시 남베트남은 미군이 남겨준 최신 장비로 무장한 100만 명이 넘는 지상군과 세계4위의 공군력 등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가지고 있는 북베트남과 NLF의 전력은 결코 남베트남과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이에 맞선 남베트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한 채, 4월 30일 사이공 함락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오늘날의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 Vietnam)''이 수립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베트남이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은, 남베트남 정정(政情)의 혼란과 함께 고위관리 및 군인들의 부패가 민심을 이반시키는 촉매작용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병력의 숫자와 무기의 성능만으로 전쟁의 승리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교훈을 입증한 셈이다.
또한 남베트남의 패망과정은 역사 및 문화적으로 유사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비슷한 유형의 분단체제를 겪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함께 민·관·군의 혼연일체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할 때인 것이다.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정책 구현과 군사외교 강화 (국방일보)
이전글 忠孝精神은 우리 民族 精神의 뿌리이다 (월간 忠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