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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전장새부 선임연구원 남정옥 |
c 120년 전(前) 5월 22일은 한미(韓美) 양국이 최초로 외교관계를 수립한 날이었다. 조인 장소인 제물포 화도진 언덕 위에는 미국 측이 미리 설치한 장막이 있었고, 그 앞에는 미국의 성조기와 조선의 임시 국기인 ''태극도형기''가 교차되어 있었다. 제물포 앞 바다에는 미국 대표를 태우고 온 군함 스와타라호와 이를 감시하기 위해 내한한 청국 군함 위원호가 정박한 채, 한미간의 역사적인 조인식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1882년 외교관계 수립 c조선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미국 대표 슈펠트(Shufeldt) 제독이 이 날 오전 10시 48분에 ''조미수호통상조약''문에 서명하자, 미국 군함 ''스와타라''호에서는 한미조약 체결을 축하하고, 아울러 중국의 종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독립국으로 출범하는 조선 국왕을 위해 21발의 예포를 발사하였다. c그렇지만 한미조약을 맺기까지에는 많은 애환이 있었다. 1757년 중국에서 미국산 인삼과 조선의 고려인삼이 경합을 벌인 것을 시작으로 최초 양국간의 접촉이 이루어지다가, 1850년대 미국 상선과 포경선이 한국 연안에 표착(漂着)하면서 양국간에는 직접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미국의 포함외교가 충돌하여 빚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로 인해 양국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c1870년대 초기 대원군이 물러나고,
1876년 강화도 조약과 1878년 미국 상원 해군위원장 사전트 의원의 ''조선수교를 위한 사절단 파견'' 결의안이 의회에
상정되면서 양국관계는 호전되었다. 1881년 미국 정부는 조선 방문 경험이 있는 슈펠트를 조선특명전권공사에 임명하여
조선과의 수교를 명하였다. 이 때 중국의 이홍장이 양국 수교를 위해 적극 주선하면서 그 동안 난항에 부딪쳤던 한미교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c1882년 한미조약으로 양국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많은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중에서도 수교 6년째인 1888년 4월 퇴역장군 다이(Dye) 준장을 비롯한 4명의 미국 장교들이 우리 나라 최초의 사관학교인 연무공원(鍊武公院)에서 실시한 근대식 군사교육은 초기 한미군사관계에서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청국 ''조선속방론''에 쐐기 c이들 미국인 교관들 중 다이 장군은 1894년 연무공원이 폐지된 뒤에도 왕실 시위대 대장으로서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현장에 있었던 한국 근대사의 증인 중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하였다. c이처럼 한미조약은 조선을 근대화의 물결 속으로 뛰어 들게 하여 그 동안 청국이 줄기차게 제기해온 ''조선속방론''(朝鮮屬邦論)에 쐐기를 박음으로써 조선이 진정한 독립국임을 천명하게 하였고, 이 후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조약 체결시 청의 간섭 없이 외교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또 미국의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근대식 군사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강병육성에도 전력하였다. c특히 한미조약은 오늘날 한미동맹과
한미연합방위태세, 그리고 정부수립 직후 국방개념으로 채택된 연합국방(聯合國防)이 모두 ''미국과의 연합''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고, 또 이의 근원이 19세기의 연미론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1882년 한미조약 체결이 주는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