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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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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중공군 제6차공세와 국군 제3군단 붕괴의 교훈 (국방일보)



제목 :
중공군 제6차공세와 국군 제3군단 붕괴의 교훈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최용호

수록 : 국방일보, 2002.04.29


c1950년 10월 중국 공산군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명분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기습적으로 격파하고, 38선을 넘어 남진을 계속하였다. 이에,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과 삼척을 연하는 37도선까지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하고, 다시 반격에 나서 1951년 3월 15일에는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다.
c이어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계속되자, 중공군 사령관인 팽덕회(彭德懷)는 "또 다시 서울을 점령하여 모택동(毛澤東)에게 노동절(5월 1일) 선물로 바친다"는 목표 아래 한국전쟁참전 이후 다섯 번째의 공세 즉, 제5차공세를 감행하였다. 이때 중공군은 유엔군의 공중공격과 파평산 및 설마리 일대의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저지되자, 제5차공세의 실패를 조기에 만회하기 위해 연이어 제6차공세(중국은 "第5次 戰役 2階段 攻勢"로 호칭)를 계획하였다.
c제5차공세시 중공군은 서울북방에서 유엔군의 화력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던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제6차공세는 한국군부대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동부산악지역을 목표로 선정하고, 불과 1주일만에 서부의 주력을 동부로 재배치하였으며, 인제군 신남 일대의 국군 제5·7사단을 돌파하여 현리 일대의 국군 제3군단(제3·9사단)을 포위 격멸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중공군은 1951년 5월 16일 밤, 동부지역의 북한군과 함께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국군 제5·7사단 지역에 압도적으로 우세한 9개 사단을 투입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형성된 돌파구를 이용하여 2개 사단을 현리 후방의 오마치와 침교로 진출시켜, 제3군단의 후방을 2중으로 차단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잘 알지 못하였던 제3군단의 예하부대들은 다음날인 5월 17일 오전 중까지도 아무런 대책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또한, 이날 14:00경 비행기로 현리를 방문한 군단장 역시 "선임사단장의 지휘하에 오마치를 돌파하라"고 명령한 후, 속사리에 위치한 군단사령부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제3·9사단은 이 날 밤 1개연대 씩을 차출하여 오마치 돌파작전을 시작하였으나, 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부대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렸다.
건제(建制)가 무너진 부대들은 누구의 통제도 없이, 무질서한 철수를 시작하여 무작정 방대산을 넘어 남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부대는 이때 무거운 공용화기부터 버리기 시작하여 개인화기까지 버린 병사도 있었으며, 계급장마저 떼어버린 간부도 있어, 전투원이라기 보다는 피난민과 다름이 없는 행렬이었다.
c이어서 중공군의 집요한 추격이 계속되자, 제3·9사단은 하진부리까지 70km를 철수한 후에야 겨우 부대를 수습할 수 있었다. 한편, 미 제8군사령부는 5월 19일 아침, 서울동남방에 배치된 미 제3사단을 전환하여, 중공군의 퇴로를 차단할 수 있는 속사리 북방의 운두령을 점령하게 하였다. 그 결과 퇴로가 차단된 중공군은 제3군단이 붕괴되었던 것처럼, 막대한 피해를 입고 붕괴되어, 화천저수지 일대까지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에게 결코 완승(完勝)을 거둘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소규모의 고지쟁탈전으로 전환하였으며, 마침내 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 짓기 위한 협상테이블에 나서게 되었다.

c한편,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현리전투의 책임을 물어 국군 제3군단을 해체하는 극약처방을 내렸으나 보다 큰 실수는 상급부대에 있었다. 당시 제8군의 정보판단은 중공군의 주력이 불과 일주일 사이에 서부에서 동부로 재배치되었음에도 "중공군 제6차공세의 목표가 서울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또한, 제8군은 국군 제5·7사단이 붕괴된 5월 17일 아침까지는 중공군의 주공방향을 식별하고, 대책을 강구할 수 있었음에도 19일 아침에야 비로소 미 제3사단을 전환시켰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3군단이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제8군의 판단착오와 조치부실''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면, 제3군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마치를 차단한 중공군이 5월 17일 아침, 중대규모에서 오전에 대대, 저녁에는 사단규모로 증강되었기 때문에 군단의 돌파작전은 17일 오전이었다면 가능할 수 있었으나, 그 이후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전투가 마무리 된 5월 27일까지 70%의 병력과 30%의 장비가 수습되었지만, 만약 군단의 동측 설악산 일대에서 공격하였던 북한군이 그들의 계획대로 방대산 후방으로 진출하였다면, 더욱 심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을 것이다.
c따라서 당시 제3군단은 ''방대산을 넘는 무질서한 철수''보다는 "현지를 방문하였던 군단장의 현장지휘와 유엔군의 공군력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예상치 못한 방책을 강구했어야만 했다. 이 경우 ''현리 일대의 전면방어'', 또는 ''인제-홍천 축선의 새로운 방향 공격'' 등의 방책도 고려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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