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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3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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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2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사령부에서 국방부까지 (국방소식)



제목 : 국방사령부에서 국방부까지

저자 : 국방사부 선임연구원 백기인

수록 : 국방소식-138호, 2002.05


c광복 후, 이땅에 나타난 최초의 국방부는 1945년 11월 13일 미군정 하에서 발족한 국방사령부(國防司令部, ODND)였다. 국방사령부는 당시 군정청이 들어선, 지금은 사라져버린 일제 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 별관에 위치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 31일 미 군정청의 치안국장 겸 헌병사령관인 쉬크 준장의 건의에, 아놀드 군정장관의 동의와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관의 승인으로 이루어진 조처였다. 군정법령 제28호(Ordinance No.28)에서는 국방사령부의 성격을 확고하게 명문화하고 있다.

c국방사령부내에는 군무국과 경찰국이 설치되었고, 군사업무를 담당하는 군무국 예하에 육군부와 해군부가 있었다. 1946년 1월 15일 국방사령부는 군무국 내에 부서를 보강하고 경비대의 창설을 위한 모병사업을 전개하면서 국방군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그후, 3월 29일 지휘감독하에 있던 경무국을 경찰업무로 분리 독립시키는 한편, 한국인 자력에 의한 정부 운영이라는 차원에서 군정청 집행부서의 국(局)을 부(部)로 개칭할 때 국방부(國防部, DND)라 부르게 되었다.

c국방부라는 명칭은 임시정부의 헌법안에서 잠시 보이고 있지만, 역사상 공식적인 정부 기구로서 국방부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개칭과는 상관없이 그 임무와 기능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한 소련측이 "국방부는 무슨 의도로 설치했는가"라고 항의하여 국내경비부(DIS)라고 변경하게 되었다. 양국이 한국의 장래문제를 논의하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1946년 6월 15일의 일이었다. 한국인들은 경비부를 한말의 군제인 통위영을 본뜬 통위부(統衛部)라고 불렀는데, 그 청사는 서울의 남산동 2가에 있었다.

c통위부는 1946년 9월 12일, 광복군 출신인 유동열(柳東說)이 부장으로 정식 취임하면서 건군의 견실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에게는 주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경비대의 모든 통신, 명령, 지휘, 요구를 한국인 참모를 통해 시달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어는 공식적인 언어가 되었고, 다만 영어 통역이 중요한 문서에 병기되었다. 통위부는 통위부장을 최고 수장으로 하고, 참모총장과 그 예하에 조선경비대총사령부와 조선해안경비대총사령부를 두었다.

c1948년 5·10총선거를 전후로 통위부는 경비대를 5만명 수준으로 확장하기 위한 국방력 증강계획의 산파 역할을 맡았다.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정부가 수립된 후 8월 31일, 유동열 부장과 초대 국방부장관 이범석 사이에 정식 사무이양식이 거행되었다.「정부조직법」(법률 제1호)에 의해 조직된 국방부(MND)로 모든 임무와 기능을 이관하는 조인식이었다. 유동열 통위부장은 국방부의 출발을 기뻐하면서 ''심·덕·체''를 하나로 한 조국의 재건과 방위에 중추가 되달라면서 국방부와 군의 장도를 크게 격려하였다. 전 국민의 여망 속에 출범한 국방부의 시작은 ''건군의 심장''이자 ''국가안보의 보루''로서의 벅찬 민족적 사명감으로 가득 찬 감격의 순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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