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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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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북한의 6.25남침 준비과정과 소련,중공의 역할 (향방저널)



제목 : 북한의 6.25남침 준비과정과 소련,중공의 역할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양영조

수록 : 향방저널, 2002.06월호


c 최근 공개된 소련 문서에 의하면, 남침 1년 6개월 전인 1949년 초부터 북한의 김일성이 이미 스탈린에게 남침 의사를 제기하고 있었으며, 아울러 소련도 군사고문단과는 별도로 약4천여 명의 병력을 북한에 잔류시켜 전쟁준비를 지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이들 소련 자료를 중심으로 김일성의 남침 준비과정을 분석하고 그 과정에서 소련과 중공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c이에 관하여 먼저 1949년 3월초 김일성-스탈린 회담 내용이 주목된다. 즉 김일성은 동년 3월 5일 김일성은 박헌영을 대동하고 경제지원, 군사력증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방문하였다. 이 회담에서 경제협력과 무역, 기술지원, 문화교육 분야의 협력, 북한 아오지-소련 크라스키노 사이 철도건설, 군사력 건설 등의 협의를 가졌다. 특히 이때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사실이다.

c즉, 김일성은 ''무력에 의한 조선통일방안''을 스탈린에게 문의하였으며, 이에 대해 스탈린은 북한군이 한국군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선제공격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스탈린은 남한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남한의 침략을 격퇴하는 경우에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북한이 방어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이 비록 스탈린으로부터는 남침에 관한 합의를 얻지 못하였으나, 그것은 내부적으로 군과 내각일부에서 일찍부터 구상 또는 논의되었을 것을 짐작케 한다. 이는 북한 지도부가 남한의 민중봉기 등을 통하여 전 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한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력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전략을 전환한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c1949년 3월 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경제부흥발전 계획지원을 위해 4,000만 달러의 차관, 기술지원, 전문가 파견 등을 합의하였으며, 이때의 차관은 상당부분 인민군의 무기 및 장비수입에 사용되었다. 회담에서 김일성, 박헌영은 스탈린으로부터 남한의 군사력, 주한미군, 38도선 무력충돌 등에 관해 질문을 받았으며, 북한의 해군과 공군 지원, 북한군중 일부를 소련군사학교에 위탁하여 실시할 것 등을 약속 받았다. 여기에서 합의된 구체적인 지원사항은 곧이어 3월 12일 개최된 김일성과 국방상 불가닌과의 회담에서 논의되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c이와 같은 합의 내용을 골격으로 동년 3월 17일에는 소위 ''전쟁지원의 성격, 소련에서의 북한군 교육 및 경제관계의 발전과 기타 문제들에 관한 조·소 협정''이 체결되었다. 당시 이들간에는 ''경제·문화협정''이 체결된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을 뿐이었는데, 소련 문서에 의해 당시 회담과 협정의 중점이 군사력 지원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c이로써 북한은 1949년도에 소련으로부터 소총 15,000정, 각종포 139문, T-34 전차 87대, 항공기 94대 등 많은 군사장비를 인도 받게 되었으며 특히 항공기와 전차 등의 지원은 이미 남한과 현격한 전력격차를 유발시키고 있었다. 1950년 초 김일성이 대남 전력을 낮게 평가하고 있었던 것도 이러한 군사장비를 보유하게 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c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 조·중 문제는 양국간의 회담을 통해 논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관한 내용은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가 스탈린에 보낸 보고서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며, 북한-중공과의 회담에서도 남침 방안이 협의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1949년 4월 28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대표 김일이 중공을 방문하였다. 그는 고강·주덕·주은래뿐만 아니라 모택동과 3월의 스탈린과의 합의내용 및 북한의 남침 방안 등에 대하여 협의하고 중공군 내의 한인사단의 북한 인민군 편입문제를 확정지었다.
이때 모택동은 한반도 정세에 대하여 "한국에서의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수 있으며 빨리 끝날 수도 오래 끌 수도 있다. 지구전은 북한에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 바로 곁에 소련이 있고 우리들이 만주에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말하고, 이 경우 "중공군을 파병하여 일본군을 격퇴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국제정세가 별로 유리한 상황이 아니며,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군과 전투 중에 있으므로 잠시 행동을 유보하도록 권고하였다. 한인사단에 대하여는 2개 사단의 이관에 동의하였으며 나머지 1개 사단은 중국 남부에서 전투 중에 있으므로 후에 인계할 것을 약속하였다.

c주중 소련대사 코발료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에 의하면, 모택동과 김일 회담에서 모택동은 ''남침시기는 기다려야 할 것이며 만약 50년 초 국제정세가 유리해지면 남침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이 회담은 만약 일본군이 투입된다면 이에 대응하여 중공군도 파병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천명된 점에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c이때의 회담 내용은 모택동과 김일성이 각각 1949년 5월 14일과 17일에 소련 대사를 통하여 스탈린에게 전달되었다. 이로써 북한, 소련, 중공간에는 동년 3-4월 일찍부터 남침이 논의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국전선이 창설된 직후인 동년 6월-7월 집중적인 북한의 평화통일 제의는 군사적 공격을 위한 명분의 축적이었다는 분석은 설득력을 갖는다. 김일성은 적어도 동년 초부터 남침을 전제로 하고 있으면서 꾸준히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또 이를 외부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오히려 대외적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평화통일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c한편, 모스크바회담 이후 인민군의 전력은 크게 증강되었다. 이에 고무된 김일성은 1949년 8월 12일 일시 귀국하는 스티코프 대사에게 대남선제공격을 준비해야겠다는 문제를 제안하였다. 그 요지는 미군이 철수함으로써 38도선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또 38도선 분계선 충돌로 인해 인민군의 전력이 우세하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며, 더욱이 남한이 조국전선의 평화제의를 거부하고 있으므로 무력침공을 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c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실현될 수 없게 되자 김일성은 38도선에 가까운 강원도 삼척에 ''해방구'' 건설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문제 역시 소련의 반대에 부딪히자, 또 옹진반도 점령 계획을 제시하였다. 옹진 지역의 확보는 장차 공격작전에 유리한 발판이 될 뿐만 아니라 전선을 120㎞나 축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 역시 북한의 전력이 아직 미비하다는 소련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으며, 스탈린은 소위 민주기지를 강화, 즉 남한 내에 빨치산 활동을 강화하고 ''반동체제''의 파괴와 남한에서 인민봉기의
확산, 인민군의 증강에 최대한 힘을 집중하도록 스티코프 대사를 통하여 지령하였다.

c한편 소련 공산당 중앙위는 동년 9월 24일 남한공격 시기가 적절하지 못함을 지적하면서 평화통일가능성을 너무 도외시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소련이 1949년 9월까지도 미소 공위에서 합의된 사항에 관하여 대단히 조심스런 입장이었으며 특히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소련의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박헌영은 미군철수후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고 평화통일의 가능성은 없으며 남침만이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향은 하부 기관에도 간접적으로 전달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c김일성은 소련의 합의와 무관하게 49년 10월 14일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옹진을 공격하였다. 이 사태처리에 대해서는 미국보다 소련이 훨씬 더 조심스런 입장을 갖고 있었다. 모스크바는 스티코프 대사에게 옹진공격의 사전계획과 행동에 관하여 보고하지 않은 사실을 두 차례나 질책하고 있다. 모스크바는 동년 11월 20일 시점까지도 스티코프에게 "38선상의 충돌을 일으키지 말라는 본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c그러나 김일성은 1949년 10월 중공이 내전에 승리하여 정부를 수립하게 되자 "이제 남조선 해방의 차례"라고 하며 중공과 소련을 설득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1950년 1월 17일 외상 박헌영 주재 만찬에서 스티코프 대사와 참사관들에게 선제 공격계획에 관한 승인을 얻기 위해 스탈린과의 회담을 주선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이 자리에서 제기된 다음과 같은 김일성의 발언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c즉, 김일성은 "남한 인민은 나를 믿고 있으므로 우리의 군사적 지원을 원하고 있다. 빨치산 문제로 해결할 수 없다. 남한 인민은 우리에게 좋은 군대가 있다는 것을 안다. 나는 최근 아주 고심하고 있으며 밤잠을 못 이루며 통일문제를 생각한다. 북침시 남침은 불필요하며, 이승만이 북침 하지 않기 때문에 인민군 공격행동을 허락 받기 위해 (소련) 방문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김일성의 발언은 북한이 소련의 ''북침시에만 반격 허용''이라는 제한적 공세허용을 받은 이후부터 남한이 북침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기대의 내면에는 대남전력에 자신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c결국 김일성은 스티코프의 주선으로 1950년 4월초에 비밀리에 다시 스탈린을 방문하여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그리고 공산당 내부문제 등에 관하여 협의를 하였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비로소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의 ''통일과업을 위한 선제 남침을 개시''하는데 허락하였으며,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북한과 중공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모택동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

c이에 앞서 1949년 12월 16일 중공의 모택동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1950년 2월 17일까지 2개월 동안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수뇌들과 회담을 가지고 《중소우호동맹상호조약》, 《장춘 철도·여순 및 대련에 관한 협정》,《차관협정》을 체결하고 귀국하였다. 「스탈린·모택동」회담은 표면적으로는 발표된 바와 같이 ''중·소'' 양국간 문제에 국한된 것 같으나, 당시 국제 및 동아시아 정세로 보아 냉전체제하의 양국간 결속 다짐은 물론 세계공산화를 위한 역할 분담이 협의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으며, 최근 공개된 자료에 나타난 김일성 발언으로 미루어 북한의 남침지원 문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c1950년 4월 25일 모스크바로부터 귀환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 회담 결과에 따라 다음달 13일 북경의 모택동을 방문하였다. 이날 김일성 일행은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설명하자,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직접 설명을 듣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모택동의 요청을 받은 스탈린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창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중공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공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라고 응신하였다.

c한편, 1950년 5월 모택동은 스탈린의 메시지를 받은 후 동년 5월 15일 김일성 및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여기에서 김일성은 북한이 전쟁계획을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제의->전투행위의 3단계 전략을 수립했다고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모택동과 전쟁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지침, 미군과 일본군의 참전 가능성 문제 등에 관하여 토의하였으며, 그 밖에 우호동맹상호원조 조약은 통일후에 체결하기로 합의하고 동년 5월 16일 평양으로 복귀하였다.

c결국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복귀후 곧 남침공격 작전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도록 북한군 총참모부에 지시하였고, 결국 총참모장 강건과 새로 부임한 소련군사고문단장 바실리에프 중장이 중심이 되어 5월 29일에 이를 완성하였다. 따라서 남침계획은 1개월 기간으로 3단계로 구성되었고, 마지막으로 1950년 6월 16일 스티코프 대사를 통해 스탈린의 동의를 받은 후 남침 개시일자를 6월 25일로 정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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