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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9: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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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한국전쟁 초기 피난민과 게릴라



제목 : 한국전쟁 초기 피난민과 게릴라

저자 : 전쟁사부 선임연구원 양영조

수록 : 국방저널, 2002.06월호


c 전시에 군에 부여된 가장 어려운 임무 중의 하나는 효율적인 피난민 통제와 아울러 적 게릴라에 의한 간접접근전략에 대한 대책일 것이다. 특히 한국전 초기와 같이 피난민들이 군 작전지역에 대규모로 유입되고 또 적이 이들을 이용하여 게릴라들을 침투시켜 아군을 기습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피난민통제 문제는 더욱 심각한 난제였다. 따라서 한국전쟁 초기 전장내의 피난민통제 문제는 적 게릴라의 침투 문제와 관련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다.

c한국전쟁 직전 1950년 3월말∼4월초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을 방문하여 전쟁개시에 관한 비밀회담을 갖는다. 그 대화 내용가운데에는 북한이 한국 내에 첩자들을 침투시켜 놓았다는 부분이 나온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군은 전쟁 전까지 4차에 걸쳐 대대적인 숙군 작업을 강행하였고, 그 결과 군내에 포진한 많은 좌익들을 색출할 수 있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는 점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개시 직전까지 김일성은 자신들이 심어놓은 첩자들에 대해서 일정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c김일성의 기대처럼 북한이 남침을 개시한 직후 게릴라들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들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즉, 첫째, ''인민유격대'' 요원을 후방으로 침투시켜 후방 교란을 기도한 것이며, 둘째, 북한군 각 부대가 작전에 앞서 민간복장으로 변장한 편의대를 투입시켜 아군의 방어진지를 교란하여 개문(開門)의 역할을 한 것, 그리고 셋째, 남한 내에 잔존한 소위 빨치산과 지하 남로당원들을 지도하여 양민들을 선동하고 아군의 후방을 습격하거나 교란시키는 것 등이었다.

c북한이 비교적 용이하게 게릴라를 후방으로 침투시키거나 활동을 지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 초기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고 있었던 피난민을 이용하였기 때문이었다. 게릴라들은 피난민 대열에 섞여 작전지역을 자유롭게 왕래하였고 때로는 아군의 후방진지를 기습하거나 아군에 관한 정보를 적시에 북한군에게 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c남침 당일부터 정부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민심의 동요를 막는 것과 함께 피난민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었다. 피난민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집단적 소요가 발생하거나 적의 작전에 크게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피난행렬이 전투지역을 통과하거나 아군의 주요 작전도로를 메우게 되어 부대 기동과 보급에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c정부는 남침 당일부터 <긴급명령>과 <비상경계령>, 그리고 <치안명령>을 하달하여 불순불자들의 만행을 방지하는 등 각종 치안 안정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민심은 크게 동요되었고 각종 범죄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으며, 급기야 북한군의 진격으로 공포와 혼란이 초래되었다. 대부분의 시민 특히, 정부 요인이나 공무원, 군인 및 그 가족들은 공산측에 의한 서울 함락을 염려하여 서둘러 피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c당시 서울에는 한강 이북에 175만 명, 영등포 및 그 주변에 25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1950년 6월 28일 새벽까지 피난을 떠난 숫자는 전체 시민의 약 50%인 10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 의정부, 동두천, 포천 등 전방지역에서 피난 온 주민들을 합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피난에 나서고 있었다.

c피난민 행렬은 한강 이남에서 오산-평택-천안-대전으로 이어졌으며, 각종 이동수단 및 수송수단을 이용하여 무작정 후방의 안전지대를 찾아 이동하려함으로써 작전상 장애가 되고 있었다. 피난민의 이동경로는 대부분 산악 지대를 피하여 국도 변과 철로를 따라 대전까지 왔다가 도보나 철도편으로 대구와 부산으로, 그리고 광주나 목포 등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c서울에서 내려오는 피난민에 각 지역의 피난민들이 뒤섞여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수원 인구 50만 명중 상당수가 남하하였고, 조치원, 평택, 천안 등의 주민들도 노약자를 제외한 대부분이 피난길에 올랐다. 이에 따라 1950년 7월 수원-대전-김천-대구로 향하는 길목에는 약 200 300만 명이 피난을 하고 있었다고 추산된다. 피난민 대열 속의 게릴라에 의해 유포된 유언비어는 홍수처럼 밀려드는 피난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었다.

c이에 정부는 군사작전에 수반되는 대민 관계를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조처로 <비상계엄령>(1950.7.8)과 <피난민 분산에 관한 통첩>(1950.7.10)을 하달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피난민 증서를 발급하여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밀집되고 있는 피난민들을 분산 수용하고 또한 게릴라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c이에 따라 한국 군경과 각 지방공무들은 수원 이남 대전 지역에서 육군 헌병의 지원을 받아 공산주의 동조자나 게릴라를 가려내기 위해서 검문소 설치 등 보급로 상의 피난민에 대한 통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시기적으로 너무 급박하였고 또 전장이 너무나 신속하게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적용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 무렵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마저도 교도관의 이탈로 통제가 어려웠던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때 피난민 통제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c1950년 7월 한달 내내 피난민 대열은 계속 증가하여 주요 작전도로를 모두 메워 부대기동을 제한하였으며, 또 이들 피난민대열 속에 침투한 적 게릴라가 아군을 기습하는 사례도 증가하였다. 피난민속에는 위장한 북한군 정찰병들이 숨어들어 암암리에 농촌부락을 순회하며 주민들을 선동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들은 차량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마을을 순회하는 경우도 있었다.
적 편의대 기습 사례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국군 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의 전사일 것이다. 채 장군은 총참모장에서 물러난 직후 경남관구사령관에 임명되어 모병 활동을 수행하였고, 미군이 투입되자 그 안내를 자청하였다. 그 과정에서 하동 고개에서 아군복장으로 변복한 일단의 적 편의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고 채 장군은 머리에 총탄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세계 전사상 전례가 없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c이 같은 적 게릴라의 활동은 피난민이 집중되었던 경부가도 연변의 미군 방어지역에서 특히 많이 발생하였다. 미군의 선발대인 스미스특수임무부대가 7월 4일 죽미령에 배치될 때 지역 주민과 게릴라들의 방해로 배치에 다소간의 차질을 빚은 것을 시작으로 대부분의 미군은 피난민을 가장한 적 게릴라들로 인해 큰 난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c미 제24사단 주력이 7월 7일 천안지역에 방어선을 편성하고 처음으로 대전차지뢰를 정정동 열차 건널목과 진천-온양 도로에 매설하고 피난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도로 옆, 논둑 길로 통행하도록 도로를 통제하였다. 그러나 대전차지뢰는 북한군이 침투시킨 민간인과 국군복장으로 위장한 게릴라들이 제거하였기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사단은 전투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미군은 전투지역내 피난민과 게릴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

c따라서 미군들은 이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피난민에 대한 엄격한 통제책을 강구하였다. 미 제25사단의 경우 최초 7월 18일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하 부대들로 하여금 마을이나 작전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피난민들에 대해서 검색을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전쟁기간에 군이 취하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사단은 피난민 문제가 부각되자 한국경찰의 협조를 받아 검문소 설치, 민간인의 소개 및 전투지역으로의 이동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c그러나 피난민을 가장한 적 게릴라들의 공격은 심각할 정도로 증가되었다. 적 게릴라들은 피난민들을 유도하여 보급로의 교통을 방해하거나 통신선을 절단하였고, 또 아군 방어선 안으로 침투하여 아군을 저격하거나 후방지휘소를 기습하였으며, 아군이 매설한 지뢰를 제거하거나 적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 특히 아군 포병은 공포에 빠질 만큼 피난민을 가장한 게릴라들의 기습을 자주 받았다. 동부전선을 맡고 있는 국군보다 경부가도 축선을 방어하던 미군들이 게릴라의 기습목표가 되어 피해사례가 속출하였다. 당시 미군들에게는 흰 옷 입은 한국인 피난민들 모두가 게릴라로 보였다고 할 정도였다.

c통상 게릴라들은 각 지방별로 백여 명에서 1천여 명 단위로 조직되어 적게는 2∼3명, 많게는 30여명으로 나뉘어 피난민 속에 잠입하였다. 그들은 지시된 지점에 집결하여 무기를 조립하고 주간정찰을 실시한 후 밤이 되면 후방 군수시설이나 지휘소를 습격하고는 해가 뜨기 전에 산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그 수법이었다. 이들은 무기와 탄약을 우마차나 광주리, 이불 속에 분해하여 숨겨서 운반하였다. 당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내무장관 조병옥도 "공비들이 평민을 가장하고 유엔군 진지에 따발총을 가지고 습격하였다"고 하여 당시의 심각성을 술회하였다.

c아군이 피난민들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게릴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50년 8월 낙동강방어선이 형성될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피난민 통제와 게릴라 토벌을 위한 체계적인 대책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아군은 1만 5천여 명의 한국 경찰이 유엔군에 배속되어 적 게릴라 토벌과 아울러 소규모 전투를 군과 병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낙동강방어선의 돌출부진지 점령에 앞서 강으로부터 8Km 이내의 주민과 피난민들을 소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c대구 북방, 창녕·영산 지역, 마산 등지의 낙동강방어선 부근의 주민과 피난민들이 대규모로 후방지역으로 소개되었다. 국군과 미군은 피난민들을 먼저 수용소에다 집합시켜 놓고 심문·신체검사·소지품 검사 등을 실시한 다음 군에서 지정한 경로로 호위하도록 하여 주간에만 이동시켰다. 검문소에서는 지뢰탐지기와 여자 검사관으로 하여금 엄중하게 조사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은 사단을 거쳐 수용소로 송치시켰다.

c이러한 소개작전이 완료된 이후 8월초부터 아군은 작전적 측면을 고려하여 피난민들을 낙동강 동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통제하였다. 이에 수십만의 피난민들이 낙동강 서안에서 우왕좌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가면 아군의 사격위협을 받아 피해를 보고 정지해 있으면 북한군에게 위협을 받아
내몰리는 등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c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왜관교 부근에서였다. 이때 미 제1기병사단은 게릴라와 민간복장을 한 북한군이 피난민에 섞여서 진지 내로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난민이 낙동강 동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 조치는 피난민들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조치였으나 유엔군으로서는 부득이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낙동강 서쪽 교량 부근에는 강 건너편으로 피난하려고 하는 수 천 명의 피난민들이 도강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c1950년 8월 4일 해질 무렵 후위의 제8기병연대가 다리를 건너기 시작하자 피난민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위협 사격도 소용이 없었다. 피난민들은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폭파시기를 놓친 게이 사단장은 피난민들을 물러서게 하여 교량을 파괴시키려고 하였으나 피난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사이에 날은 저물어 버렸고 드디어 북한군의 사격이 시작되자 교량이 폭파되었다. 사단장은 후에 교량 폭파시기에 대한 판단이 자신의 생애 중에서 가장 어려웠다고 고백하였다.
이렇게 낙동강방어선 형성 시기의 피난민통제는 피난민에게 불편을 초래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적 게릴라의 침투를 막고 피난민으로 야기되는 군사작전의 제반 장애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결국 1950년 8월초 낙동강선으로 철수하여 교두보를 형성한 국군과 유엔군은 결사의지로 고수작전을 수립하였고, 아군은 교두보 내에서 피난민을 가장한 게릴라나 좌익의 폭동을 방지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낙동강방어작전의 중요한 성공 요인중의 하나로 평가된다.

c전쟁시 군에게 있어서 피난민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민간인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은 작전 이상으로 중요한 임무일 것이다. 군은 한국전쟁의 사례를 귀감으로 삼아 사전에 철저한 피난민 통제정책 수립과 훈련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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