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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14: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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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09>
<9>전성기 고구려 국가발전과 전략
[`남진·서진'… 팽창정책으로 영토 확장 / 2011.07.07]

고구려인들은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서 강인하게 단련된 전사나 다름없었다. 그러한 국민들의 기질을 영토확장에 연결시켜 고구려를 대제국으로 만든 이가 바로 광개토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이다. 광개토왕은 391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해 39세에 세상을 뜰 때까지 20여 년간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했다. 길림성 집안에 있는 ‘호태왕비’가 말해 주듯 왕은 북으로 요동지역을 포함한 송화강 유역과 동으로 지금의 길림과 연해주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어 장수왕은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해 한반도의 임진강 일대까지를 아우른 대제국을 건설했다.

요동 지역의 요충지 백암성 일대 전경 사진
고구려 주변국의 형세(5세기) 사진(필자 제공)

● 쌍방향 국가팽창 전략

전대의 선왕들이 일군 고대국가의 기틀 위에서 4세기 말 광개토왕이 추진한 대외팽창정책은 ‘남진’과 ‘서진’의 쌍방향 국가확장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전략을 추진하려면 양면의 위협요소를 제거해야만 했다. 고구려로서는 수도 국내성을 기점으로 서북방의 후연과 남쪽의 백제와 왜의 연합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요소였다.

광개토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원정에 참여한 야전지휘관형 군주였다. 그는 백제와의 대부분의 전투를 직접 지휘했다. 즉위 직후인 392년 한강 북쪽의 백제 영토를 유린하고 그 하류의 요새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396년에는 한성마저 포위하자 백제 아신왕은 항복하고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내며 청화(請和)를 요청했다. 왕은 이를 받아들여 58개 성 700개의 촌락을 점령했지만 모두 돌려줬다. 이 때문에 백제에는 동족(同族)으로서 유화적이고 왜와의 결탁을 저지하는 데 그쳤지만 왜나 한(漢)에 대해선 엄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404년 백제와 손을 잡은 왜가 대방지역에 침입하자 대왕의 군대가 이를 섬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왕은 서북으로 거란, 동북으로 숙신을 정벌하고 후연이 버티고 있는 요동으로 눈길을 돌리려 했다. 이때 신라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다. 399년, 백제와 제휴한 가야와 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해 도읍 금성(경주)을 포위했던 것이다. 대왕은 5만의 군사를 파견해 가야·왜 연합군을 궤멸시키고 가락국의 본거지 김해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왜에 대한 엄격한 응징이 이때 다시 드러났다. 수많은 가야인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고, 금성에는 고구려군이 주둔했으며 신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치게 됐다.

남방을 평정한 대왕은 400년경부터 요하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후연 정벌에 나섰다. 후연의 반격이 만만치 않아 한때 요동의 요충지인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겼지만 결국 후연을 제압하고 요하 너머로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410년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동부여 지역을 점령했다. 평생 64개 성 1400개 촌락을 복속시킨 대왕은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진정한 강자로 군림시켜 놓은 정복 군주였다.

● 수성(守成)과 ‘등거리외교’

413년 즉위한 장수왕은 98세가 되던 491년까지 79년이라는 긴 기간을 재위에 있었던 수성 군주이자 외교전략가였다. 427년 평양 동북방(대성산) 일대의 새 도읍지로 천도한 장수왕은, 5호 16국 시대로 불리는 북중국의 분열시기가 북위(北魏)를 중심으로 재편되던 5세기 중반에 북위와의 관계를 개선하며 국경의 안정을 꾀했다. 그리고 465년 이후 매년 사신을 파견해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등거리외교를 유지하는 한편, 새 수도를 교두보로 삼아 남진정책을 추진하며 부왕이 이룩한 제국을 지켜갔다.

이미 1세기 전 고구려가 복속한 새 수도인 대동강 유역은 고조선과 낙랑문화의 중심지로서 선진문물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곳으로 천도한 장수왕은 국내의 정치세력을 재편하고 대륙의 정세변화를 주시하며 종래의 ‘원교근공’을 ‘등거리외교’로 전환했다. 등거리외교는 북위와 남조(宋)의 대결구도에 말려들지 않고 고구려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려는 실리외교였다. 북조의 강국인 북위와 선린관계를 강화해 송-북위-고구려 삼국이 군사적으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장수왕의 대외전략인 등거리외교는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추진하는 기반이 됐다. 427년 이후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도 북위와 활발한 외교를 전개했다. 백제는 고구려가 지리상의 통로를 차단해 사신의 왕래가 곤란한 점을 부각시키면서 북위를 이용해 고구려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장수왕은 북위와 백제 사신의 영토 통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효 문제의 엄중한 항의에 대해 왕은 북위와의 관계 단절도 불사한다는 강경 자세로 맞섰다. 백제 개로왕에게서 고구려 보복을 위한 지원군 파병을 요청받은 북위는 고구려와 무력대결로 가는 것을 우려해 결국 백제의 청병요청을 묵살했다. 북위의 한계를 간파한 장수왕의 영민한 조치에 백제 스스로도 북위와 관계를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

천도 후 반세기가 지난 475년 9월 장수왕은 3만의 군사로 백제를 침공했다. 혼전 중에 탈출한 개로왕은 추격대에 사로잡혀 전사했다. 고구려의 선봉으로 참전한 재증걸루(再曾桀累)와 고이만년(古爾萬年)은 본래 백제인으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탈출한 장수들이었다. 이들은 포로가 된 개로왕을 보자 말에서 내려 절한 후에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개로왕의 과오를 일일이 열거한 뒤 아차산성 밑에서 살해했다.

이 전쟁에서는 승려 도림도 한몫했다. 장수왕은 백제의 전력을 약화시킬 비밀공작원으로 도림이 죄를 짓고 고구려에서 탈출한 것처럼 위장해 백제에 침투시켰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을 바둑의 명인이라 소문냈다. 그리하여 왕의 측근이 된 그는 궁궐 증축공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하도록 왕을 부추겨서 짧은 기간에 백제의 국력이 고갈되게 만들었다. 감언이설에 속은 개로왕이 대규모 공사를 일으켜 재력과 인력을 탕진하자 민심이 크게 돌아섰다. 도림은 고구려로 돌아가 장수왕에게 백제의 혼란상을 자세히 보고했다. 475년 백제 침공은 그렇게 이뤄졌던 것이다.

● 고구려 전성기의 교훈

고구려인들이 5세기를 자국의 전성기로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탁월한 리더십과 비전을 갖춘 리더도 있었지만, 그 ‘실질적인 힘’(real power)은 군사력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광개토왕 때 고구려군은 더 이상 귀족들이 이끄는 군대의 연합체가 아니었다. 왕의 통수하에서 중앙의 직속 군대로 보병·기병·수병으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의 탁월한 전사적 능력과 정신력도 뛰어났지만 제철·제련 기술의 발달로 방어력이 좋고 공격력이 우수한 무기가 군에 보급됐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철기’로 불리던 중무장 기병이 입던 갑옷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연결한 비늘갑옷이었다. 비늘갑옷은 가볍고 충격에 잘 견디도록 만들어졌고, 그들이 사용한 철제 무기는 주변국의 전사들이 쓰던 것보다 여러 면에서 질이 좋고 우수했다. 한강변 구의동 보루에서 발견된 고구려군의 화살촉과 도끼는 ‘초강’을 소재로 한 것으로 오늘날의 철강 강도에 맞먹는다. 이처럼 우수한 철제 무기와 투구·갑옷으로 무장한 당시 고구려군은 분야별로 군사훈련을 받은 전문 전사들이었다. 이들이 탁월한 리더십과 작전능력을 갖춘 왕의 진두지휘하에 전장으로 달려나갔던 것이다. 좋은 군대는 좋은 인재와 무기, 훌륭한 전법의 운용에 달려 있는 법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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