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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1 08: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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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11>
<11>양만춘의 전쟁술
[중원 제패한 당태종 한 번도 패한 적 없이 승승장구 안시성서 무릎꿇다 / 2011.07.21]

양만춘(楊萬春)은 사서에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645년(보장왕4)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안시성(安市城)의 성주였던 그는 당군을 물리친 국난 극복의 선봉장이었다. 격변기의 정치적 파고 속에서도 양만춘은 한 성의 성주이자 군사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다.

고구려와 당나라가 필사의 전투를 벌인 안시성 전투 기록화 사진(전쟁기념관 소장)
당 태종이 직접 선두에 나서 승부를 벌인 안시성(서벽)사진

양만춘, 인물의 실존 여부

정사의 기록에는 없지만 양만춘의 이름은 중국이나 우리의 야사에 당 태종을 활로 쏘아 한 눈을 멀게 했다는 사실과 함께 등장한다.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이자 명신인 윤근수는 ‘월정만필’에서 임진왜란 때 명 나라 장수의 말을 빌려 중국의 ‘태종 동정기’와 ‘당서연의’라는 기록에 양만춘의 이름이 나온다고 전했다.

조선 중기의 송준길도 ‘경연일기’에서, 홍만종은 ‘순오지’에서 각각 양만춘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후 18세기의 실학자 박지원은 자신의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에서 안시성주가 양만춘이었다고 밝혔다. 연암은 “양만춘이 당 태종의 눈을 쏘아 맞혔다”고 덧붙였다.

애초에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안시성주에 대해 ‘가히 호걸로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며 ‘애석하게 여긴다’고만 한 것은 그가 기록에 의존해 중국 정사를 참작한 결과였을 것이다. 중국의 정사에서는 양만춘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중국 측의 입장에서 너무 치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고의로 은폐했을 것이라는 견해다.

이렇듯 안시성주로만 전해지고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양만춘의 행동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국권을 쥘 때 이에 굴하지 않고 성을 굳게 지켰다. 연개소문은 군을 동원해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양만춘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다

645년 당 나라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살해한 죄를 문책한다는 것을 구실로 내걸었다. 그러나 실상 당의 위세에 굴복하기를 거절하는 고구려를 응징하고 수 나라의 패퇴를 설욕하려는 목적이었다. 고구려도 이미 천리장성을 쌓고 당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해 3월 당 태종은 총관 이세적(李世勣) 휘하의 제장들에게 개모성과 비사성 그리고 백암성과 요동성을 치고 이어 안시성을 공략하도록 했다. 이때 고구려의 북부욕살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군과 말갈군 15만 명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고자 갔으나 이세적·장손무기 등 2만의 군사에게 패해 항복하고 말았다.

이제는 안시성이었다. 당 태종은 안시성을 놓고 바로 공략하기보다 안시성 남쪽에 있는 건안성(建安城)을 급습해 안시성을 압박하려 했다. 그러자 이세적이 안시성을 두고 건안성을 먼저 공격할 경우에 보급로의 차단이 우려된다며 안시성을 우선 공략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 태종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때 항복한 고연수와 고혜진이 안시성 함락의 어려움을 거론하며 오골성(烏骨城) 공격을 제의하자 신하들이 찬성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장손무기가 반대하자 안시성 공격을 확정지었다. 당 태종은 후일 이것이 패인이 됐기 때문에 회군해 이때를 몹시 아쉬워했다고 한다.

안시성, 총력전으로 당군을 무찌르다

드디어 당군이 안시성을 공격하자 성민들은 모두 성 위에 올라가서 북을 치며 당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닭과 돼지 소리를 요란하게 내어 성내에 군량이 넉넉한 것 같이 하고 임기응변으로 적에게 야습을 가했다. 당군이 성을 포위한 지 여러 날이 지났을 무렵 양만춘은 100명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밤에 성을 넘어 적진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가 진두지휘해 적을 참살하니 적진이 크게 동요했다. 태종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성 밑에서 독전하자 그때에 양만춘은 유유히 철수했다. 당 태종은 분격해 도종에게 수십만의 군사로 안시성 동서 기슭에 성 높이와 같게 토산을 쌓아 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성에서도 고구려군이 성을 더욱 높이 쌓고 대항했다. 당군은 하루에도 6~7차례 교대로 군사들을 출동시켜 싸우게 했다. 당군이 충차와 대포로 성첩을 파괴하자 고구려군은 목책을 세워 파괴된 부분을 막았다.

당군은 60일간에 걸쳐 주야로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해 토산을 축조해 안시성을 공략하려 했다. 그런데 돌연 토산이 무너져 안시성을 덮쳐버렸다. 고구려군 수백 명이 무너진 성 틈으로 달려 나와 당군을 무찌르고 토산을 점령했다. 당 태종은 노해 군사를 지휘하던 부복애(傅伏愛)를 참형에 처하고 여러 장수에게 토산 탈환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군이 3일 동안 공격을 계속했으나 토산을 탈환할 수 없었다. 이도종은 맨발로 태종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빌며 사죄를 청했다. 당 태종은 크게 꾸짖었으나 그를 용서하고 철군명령을 내렸다. 이미 9월이라 찬바람이 불고 차츰 군량도 끊어져 태종은 패배를 자인하고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안시성의 고구려 성민들은 숨을 죽이고 당군은 안시성 밑에 병력을 집결시켜 군세를 과시한 다음 철수를 시작했다. 성주 양만춘은 성루에 올라가 송별의 뜻을 표했다. 당 태종도 성주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사신을 파견해 비단 100필을 전달하며 “그대의 왕을 잘 섬기라”는 당부까지 하고 돌아갔다.

태종은 이세적과 이도종에게 명령해 후미부대로써 고구려군의 추격에 대비하면서 요수를 건너게 했다. 요수의 진흙벌 때문에 수레와 군마가 통과할 수 없었다. 당군은 장손무기가 수레로 교량을 만드는 등 갖은 고난 끝에 646년 1월에야 비로소 그들의 수도인 장안에 당도할 수 있었다. 당군은 고구려 침공에서 초전에 현도·백암·비사 등 10개의 성을 점령했으나 신성·건안성·주필산 3개 지역에서 벌어진 대전투로 군마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태종은 고구려 정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탄식하며 “슬프다,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내가 이와 같은 싸움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을”이라 후회하며 그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안시성 승리의 교훈

안시성의 승리는 성주 양만춘의 치밀한 계획과 지략, 그리고 탁월한 지휘력에 기인한 결과였다. 중원을 제패한 당 태종으로서는 한 번도 패배를 당해 본 적이 없었지만 안시성 전투는 그에게 참혹한 고배를 마시게 했다. 안시성 전투는 제2의 살수회전이나 다름없었다. 고구려 정벌로 세계 제국의 꿈을 이루고자 한 당 태종의 야심이 양만춘을 위시한 안시성의 결사항전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당 태종이 철수하면서 안시성주에게 비단 100필을 보낸 것은 ‘중원을 제패한 호걸다운 태도’였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무모한 고구려 정벌에 따른 오명과 수치를 만회하려는 허장성세에 가까웠다. 장안으로 돌아간 그는 병법전략가인 이정(李靖ㆍ571~649)에게 자신이 천하의 대군을 거느리고서 조그만 고구려에게 곤욕을 당한 까닭을 물었다고 한다. 그때 책사들은 “고구려의 허점을 틈타 평양을 점령하자”는 제안을 상기시켰다. 안시성을 버리고 오골성을 공취한 다음, 평양으로 진격하자는 고연수의 제안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당 태종은 최초 3개월간의 ‘단기결전 계획’을 무시한 채 변방 수비거점을 공략하는 데 집착한 나머지 결국 요동성 공략에 실패했던 수 양제의 전철을 답습하고 말았던 것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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