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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0 18:5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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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한국전쟁 초기 인력관리 실패교훈 (국방일보)



제목 : 한국전쟁 초기 인력관리 실패교훈

저자 : 전장새부 선임연구원 남정옥

수록 : 국방일보, 2001.06.28


c 전쟁의 주요 요소라고 하면 흔히 인력, 무기 및 장비, 작전계획, 그리고 戰場을 꼽는다. 이 중에서도 전투수행의 주체인 인적자원, 즉 병력의 확보는 매우 중요하다. 나폴레옹 이후 등장한 국민군의 장점은 국민개병주의에서 오는 풍부한 인적자원의 확보가 가능했기 때문에 유럽을 대상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 미국이 남북전쟁에서 약 280만명의 장정이 전쟁에 참가하여 수십만명의 사상자를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戰後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던 것도 유럽으로부터 이민으로 우수한 인적자원을 받아들일수 있는 구조적 장치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전쟁시 중공군이 현대 무기로 무장한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과 싸워 팽팽하게 맞설수 있었던 것도 무기의 성능을 능가하는 풍부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한 인해전술에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다.

c한국전쟁 초기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고 난후 전쟁의 타개책으로 상륙작전인 블루하트계획을 구상한 맥아더가 이를 행동에 옯기지 못한 것도 결국 병력 부족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7월의 상륙작전에 투입할 제1기병사단을 조기에 한국전선에 투입시키게 됨으로써 결국 상륙작전은 9월 15일 크로마이트계획으로 그 결실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풍부한 인적자원은 작전의 융통성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전쟁의 국면을 바꾸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전장에 임하는 전투지휘관에게 있어서 예비대의 확보는 작전의 융통성을 가져와 전장에서의 주도권 장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워커 8군사령관이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도 바로 예비대 확보, 즉 병력보충 문제였던 것이다.

c한국 전쟁 초기 우리 국군이나 미국이 가장 고민한 문제가 바로 이와 같은 병력 확보 및 보충이었다. 한국은 豫備戰力源인 장정에 대한 소개 및 확보를 미처 실시하지 못함으로써 병력면에서 이중적인 손실을 입었다. 왜냐하면 북한군은 남한에서 병력을 보충하여 ''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낙동강전선에 투입시켰고, 또 노무자로 군 부대에 배치하여 아군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지역에서의 병력보충도 있긴 하였지만, 이는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 공군의 폭격으로 순탄치가 않았고, 그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병력보충원은 남한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엔군사령부는 북한군의 전쟁 포로 및 노획문서를 통해서 분석한 "북한인민군사"(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에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 돌파시까지 확인된 북한군의 전투 사상자수는 약 22만명에 이른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c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군소부대가 생략되었고, 또 포로가 없는 부대나 있어도 하위계급이 많은 부대, 또는 포로가 알고 있는 정보가 정확하지 않는 부대에 대해서는 사상자수가 적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북한군의 사상자수는 이의 2배 이상으로 상정할 필요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노무부대 및 확인되고 있지 않은 실종이나 도망병을 포함된다면 그 숫자는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이들 병력보충을 대부분 남한지역에서 강제징집했다는 점이다. 즉, 북한이 보충한 병력의 대부분이 남한 출신의 장정들이라는 것이다.

c 이렇게 볼 때 북한군은 전투원 및 보조원(노무자, 전선에서의 총알받이 등)으로 최소 약 40만명 이상의 남한 출신 장정을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전선으로 끌고 갔다는 계산이 나온다. 반면에 전쟁 초기 국방부는 낙동강 방어선으로 작전지역이 제한됨에 따라 병력보충도 경상남북도 일원에 한정될 수 밖에 없어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보충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에 한국정부가 苦肉之策으로 실시한 것이 街頭募兵과 강제징집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이었던 것이다.

c이러한 실패의 교훈을 맛보았기 때문에, 정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공세이전으로 전환하여 아군이 반격을 할 때, 가장 먼저 시행한 것이 募兵機構인 각 시도별 병사구사령부를 설치하여 병력보충원인 장정들에 대한 등록을 실시하였고, 이러한 경험을 되새겨 1950년 10월 중공군 개입으로 어쩔 수 없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잠재전력인 장정의 소개와 확보의 목적으로 국민방위군을 창설하여 장차 신속한 병력보충을 위한 대책을 세워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이는 한번의 실패의 경험을 딛고 즉응전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장정들을 대거 남쪽으로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전투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후방작전에서의 공비소탕, 노무부대 창설 등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향후 작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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