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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03.07.20 18:5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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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광복군은 '國軍의 구심체' (국방일보)



제목 : 광복군은 `國軍의 구심체`

저자 : 군사사부 선임연구원 서인한

수록 : 국방일보,2001.08.18


c 일제의 패망이 예되던 1945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는 이미 특수훈련을 마친 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때 날아온 일제의 항복소식은 가슴 벅찬 낭보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힘으로 조국 광복을 쟁취하려든 오랜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비보이기도 했다. 국내에 진입하여 일본군과 싸워 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해방이 되어버렸으니 그들은 통한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임시정부 김구(金九) 주석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닥쳐온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오히려 크게 탄식한 것은 이들 모두의 심경을 대변한 것이 아니겠는가.

c임시정부는 미군이 정치단체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 방침 때문에 망명정부 자격으로 귀국할 수 없었으며, 광복군도 임시정부 군대의 자격으로 귀국할 수가 없었다. 이에 광복군은 중국에 잔류하면서 새로운 과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일제의 강제 징병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왔다가 무장 해제된 채 대륙 각지에 팽개쳐진 한적(韓籍) 청년들을 광복군으로 흡수하는 일이었다. 광복군 총사령부는 중국 정부와의 군사 협조체제를 강화하면서 한적 청년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자랑스럽게 되돌아 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도 광복군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c광복군 총사령부는 ''''''''군사외교단''''''''을 중심으로 중국 정부와 협조하면서 한적 청년들을 흡수하기 위해 대대적인 모병작전을 전개하였다. 모병 대상인 한인 청년들을 10여만 명으로 추산하고, 이들을 남경·상해·항주·한구·북경·광동 등 6개 지역에서 흡수하여 잠정 편성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10월 말경에는 5만 여명에 이르는 광복군을 편성할 수 있었다. 이들을 6개 지대로 개편함으로써 기존의 3개 지대와 국내 지대를 포함하는 총 10개 지대를 확보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귀국 후에는 이들 10개 지대를 모체로 하여 10개 사단을 창설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c그러나 광복군은 여전히 정부군 자격으로 귀국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5만 여명을 수송할 선박조차도 쉽사리 구할 수가 없어 귀국을 미루고 있었다. 결국, 1946년 2월말부터 중국 동해안 10여 개 항구로 분산하여 미 해군이 제공한 LST를 이용해 귀국길에 오른 광복군은 6월 하순에야 귀국을 완료할 수 있었다. 광복군의 귀국이 끝나가던 그해 5월 16일 이청천(李靑天) 총사령이 "이제 숙적 일본이 항복하여 연합군은 승리하고 우리 국토는 광명을 되찾았으니, 본 군의 중국 내에서의 작전 임무는 이로써 끝났다. 춘풍추우(春風秋雨) 수 십 년의 망명과 항전과정에서 우리는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하였는가! 이에 본 군은 복원(復員)을 선포, 전 대원이 귀국하여 조국 건설 대업에 참가할 것을 명한다"라는 요지의 복원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만주와 동남아에 일원에서 전개해 온 광복군의 대일 항전 임무는 종료되었다.

c이제 해방 조국에 돌아 온 광복군은 앞서 총사령부 창설식에서 천명한 대로 33년 전에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된 대한제국 군대를 이어 의병-독립군-광복군-국군으로 계승 발전할 수 있도록 창군 과업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국가의 간성인 국군은 광복군의 법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임시정부 통수부의 참모총장으로 활약한 유동열(柳東說) 장군이 미군의 지지를 받아 1946년 9월에 통위부장(統衛部長)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광복군 편련처장을 역임한 송호성(宋虎聲) 장군이 조선경비대 총사령관에 취임하자, 그밖에 많은 광복군 출신들도 경비대에 입대하였다. 그후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면서 통위부가 국방부로 개칭되고 광복군 제2지대장을 역임한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초대 국방장관에 취임함으로써 해방 공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창군사(創軍史)의 주역이 되었다.

c일찍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포고문에서 "군대는 국가의 간성(干城)이니 간성이 없이 어찌 국가를 보존할 수 있으며, 국가를 보존하지 못하고 어찌 국민이 존재할 수 있으랴, 이것은 공막(空漠)한 이론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이며, 역사가 주는 교훈이며, 우리가 직접 체험한 사실이다"라고 천명한 대로 한국광복군은 망명정부의 간성이라는 신념으로 항일 투쟁의 주체가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신생국가의 간성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창군에 참여하여 ''''''''국군''''''''의 구심체가 되었던 것이다.

올해는 ''''''''한국광복군''''''''이 총사령부를 창설한 후로 7년여 중국에서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꿈에도 그리던 해방 조국으로 돌아 온지 55주년이 되는 해이다. 반세기전 광복군이 뿌린 씨앗은 그들의 신념대로 대한민국의 간성이 되었고, 이제는 ''''''''신국방(新國防)''''''''의 기치 아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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