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1991년 말경에 한국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외규장각(外奎章閣)
도서의 환을 요구하면서 외규장각 도서가 무엇이며, 또 프랑스에 가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외규장각 도서는 여전히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반환 문제는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우리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사실 1993년 9월에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
중에 두 권을 들고 와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할 때만 해도 곧이어 나머지 도서들도 뒤따라오겠거니 하면서 순조롭게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더욱이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 정부에 고속 전철을 판매하는 문제로 세일즈 외교 차원에서 방문한 가운데
돌려주기로 한 약속이었기에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외규장각 도서는 프랑스군이 언제 어떻게 가져간 것이며, 당시 조선군은 프랑스군과 어떤 전투를
어떠한 전술로 싸웠는지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9세기 서구 열강의 무력 침공과 이에 대한 선조들의 대응 자세는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반면 교사로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전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현재 우리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가 19세기말의 상황과 매우 흡사한 점이 많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심심찮게 나오는 것을 주목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c1866년, 조선은 천주교 신자 8,000여 명과 프랑스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다. 이에 자극을 받은 프랑스 극동 함대는 조선 정부의 책임자 문책과 사과를
요구하면서 쳐들어왔다. 정찰을 위한 1차 침공이 9월에 있은 후 10월에는 2차 침공을 단행하여 16일에 강화도의 행정
중심지인 강화성을 점령했다. 이때부터 강화성을 비롯한 인근 지역은 프랑스군의 점령지가 되어 버렸다.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출동한 순무영(巡撫營)의 천총(千摠, 정3품 무관직) 양헌수가 지휘하는 부대와 프랑스군 정찰대가 접전을 벌인 것이 바로
정족산성(鼎足山城, 일명 삼랑성) 전투이다.
그런데 양헌수 부대는 경기·관동지역의 맹수 사냥꾼(山砲手) 370여명을 중심으로 급조된 500여 명이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예 프랑스군에 비해서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이 같은 수준의 군사들을 이끌고 정족산성에 들어가
프랑스군과 접전하는데는 비상한 작전 구상과 효과적인 추진만이 승리를 기약할 수 있는 겨우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양헌수는
피아의 장단점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에 적합한 작전계획을 수립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에 타격을 가하여 승리를 쟁취했던 것이다.
이 전투를 지휘한 천총 양헌수는 처음에는 조선 말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거두로 명망이 높던 화서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유학을 공부했다. 도중에 무과로 전과하여 33세 때 급제하면서 무인의 길로 들어선 인물이다. 그의 증조부
양세현(梁世絢)은 황해 병사를 지냈고, 조부 양완(梁 )은 경상좌도 수사(水使)를 지낸 무인으로서 특히 진법(陣法)에
조예가 깊어 {악기도설(握器圖說)}이라는 진법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c양헌수는 증조부와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병서들을 통해서 익힌 내용들을
실전에 활용했을 것이다. 강화 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서 실시한 정찰·매복·유인 등의 전술 행동은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월등히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서양의 근대화된 군대와 싸워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작전은 아니었다. 특히 급조된 부대를 사지(死地)로 몰고 들어가서
용의주도한 작전을 펼치는 것은 병법에 정통한 장수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치 사냥꾼들이 맹수를 덮치듯이 시종일관
치밀하게 작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승리를 쟁취하기까지의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c 양헌수는 11월 7일 야음을 틈타 제1진
170명을 3척에 나누어 강화해협을 도하시켰다. 제2진 160명은 양헌수의 인솔하에 8일 새벽 정족산성에서 제1진과 합류했다.
제3진은 날이 거의 밝을 무렵에야 가까스로 성안으로 들어왔다. 5백여 명의 병력을 자신의 작전 구상대로 프랑스군에게 발각
당하지 않고 정족산성에 은밀히 집결시킴으로써 다음 작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마지막 3진이 안전하게 건너오기를
기다리는 초조한 마음 때문에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머리카락이 다 셀 지경이었다고 술회했다. 양헌수는 우선적으로 적의 예상접근로를
판단하여 그곳으로 병력을 집중시켰다. 동문과 남문에 방어 중점을 두는 한편 나머지 두 문에도 약간의 병력을 배치했다.
일사불란하게 전투 준비를 갖추어 나가는 광경을 인근 숲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주민들도 달려나와 소 12마리와
많은 위문품을 전달하면서 장병들을 격려했다.
c정족산성에서 양헌수 부대가 전투 준비를 완료할 무렵, 프랑스 함대의
로즈(Roze) 사령관도 첩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사격술이 뛰어난 조선의 호랑이 사냥꾼들이 전등사(傳燈寺)에 들어가
항전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요지의 비교적 정확한 첩보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프랑스군의 안전을 위협할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한 로즈 사령관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육전대장 올리비에(Olivier) 대령이 11월 9일에 150여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리델(Ridel) 신부를 통역 겸 안내인으로 삼아 정찰에 나섬으로써 정족산성 전투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올리비에는 150여 명의 병력을 3개조로 나누어 2개조를 정족산성 우측 능선에서 성곽 내부의 상황을 정찰하도록 하고,
자신은 나머지 1개조를 직접 지휘하여 동남문 일대로 접근해 가면서 정찰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양헌수군의 철저한 위장으로
아무런 징후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 반면에 천총 양헌수는 이미 척후의 보고를 받고 프랑스군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이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산성으로 접근해 오자, 양헌수는 남문과 동문의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도록 지시하고
정족산 어귀에 유인조를 보내 프랑스군을 화승총(火繩銃) 유효 사정거리 이내로 유인하도록 했다. 당시 조선의 소총은 화승의
불로 화약을 폭발시켜 그 힘으로 탄환을 발사하는 방식이었기에 뇌관식의 프랑스군 소총에 비해 불리한 점이 많았다. 사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낮으며 발사속도가 느린 것은 차치하고,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비가 오는 경우에도 사격이 곤란할 정도로 제약이
많았던 것이다.
c이에 양헌수는 피아간 화기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적을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하여 섬멸하는 작전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유효사거리 이내로 끌어들여 사격을 집중함으로써 짧은 사거리와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고, 일제 사격으로 발사속도도 상당히 보완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서 유인조는 프랑스군 정찰대가 접근해
오자, 짐짓 자신들을 노출시켜 적의 시선을 끌면서 추격을 유도했던 것이다.
프랑스군은 1개조를 정족산성 우측 동문 쪽으로 접근시키고 본대는 남문 쪽을 향하여 정면 공격을 시도할 계획이었다. 양헌수는
프랑스군 정찰대가 동문쪽 계곡으로 최대한 가까이 접근해 오기를 숨죽여 기다렸다. 신호가 있을 때까지 절대로 사격하지 말라는
철저한 사격 통제 명령이 내려졌다. 잠시 후 2시경에 선두 병력이 이미 성벽 아래까지 접근하고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본대도 산성 전방 1백여 미터 지점에 이르렀다. 이때 동문에 배치된 포수 이완보(李完甫)가 방아쇠를 당기자 계곡을 울리는
총성과 동시에 프랑스군 한 명이 쓰러졌다. 이는 양헌수의 사격개시 명령이었고, 이때부터 간단없는 사격이 쌍방간에 이어졌다.
c양헌수 천총의 효과적인 작전 지휘는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들로 하여금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이와는 반대로 올리비에 대령은 속출하는 부상병을 민가로
후송하기에 급급했다. 불과 30여 분간의 교전에서 장교 5명을 포함하여 출동 병력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80여 명 남짓한 가용 병력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올리비에
대령은 퇴각명령을 내렸다. 오후 3시경부터 축차적으로 물러갔다. 이에 양헌수도 적 매복조의 기습 공격에 대비하면서 원거리
추격을 중지시키고 전투를 종결지었다.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는 지휘관과 군사들이 호흡을 일치한 작전으로서 후세에 교훈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전투가 끝난
후에 전장을 정리하면서 양헌수가 보여준 행동은 군사들과 의기투합하는 한 장수의 인간적인 면을 보는 듯하여 자못 감동적이다.
양헌수는 양근(양평)에서 달려와 용감히 싸워 준 포수 윤춘길(尹春吉)의 시신 앞에서 무릎 꿇고 통곡했다. 그는 유일한
전사자였다. 그리고 부상병의 상처에는 입을 데고 피도 빨았다. 일일이 찾아 약도 발라 주었다. 중국 위(衛)나라 장수
오기(吳起·吳子)는 병사들의 몸에 난 종기의 피고름을 빨아 치료해 준 고사를 남긴 인물이다. 군사들이 오기의 명령에 결코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 고사와 유사한 사례가 양헌수 부대에도 있었던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부하를
자식처럼 사랑한다(父子之兵)''는 옛 말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으로 보여준 것이다.
c이처럼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한 만큼 이 전투에서 패전한 프랑스군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프랑스군은 성을
점령한 후에 점심을 먹기로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접전하다가 순식간에 30여명의 사상자가 나자 퇴각하여 본대로 돌아갔다.
11월 10일 아침부터 총퇴각 준비를 서둘렀다. 그날 저녁때까지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각종 노획물과 장비들을 본선에
운반하고, 강화 유수부 일대의 주요 건물에는 모두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11일 새벽에 만조가 되자 황급히
조선 해역을 빠져나갔다. 영구 진지를 구축하는 등 장기 주둔 계획을 추진하다가 갑자기 퇴각한 것은 바로 이 전투에서
패전한 때문이었다. 마치 도망치듯이 서둘렀다는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록을 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양헌수 부대에 의해 강화성에 고립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이들의 철수를 서두르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이다.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강화도에 눌러앉아 프랑스 선교사 처형에 대한 정부의
공식 사과와 일방적인 통상조약의 체결을 요구하면서 조선을 꾀나 괴롭혔을 것이다.
c이와 같이 프랑스군에 크게 타격을 가한 정족산성 전투는 당시
강화도의 군정(軍政)을 총괄하는 강화 유수(留守)가 지키던 강화성이 쉽사리 무너져 결국 외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각종
희귀 서적들이 약탈 혹은 소각 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과 대비되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강화성의 외규장각은
왕실의 주요 도서들을 소장하던 곳이다. 국왕이 친람하는 의궤(儀軌)와 같이 예술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도서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가치로 20만 프랑에 해당하는 은괴 20여 상자와 의궤를 포함한 주요
도서 340여 책만 배에 싣고 나머지는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소재가 파악되어 반환 대상으로 거론되는
도서는 297책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귀중본 도서들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강화성이 함락되는 바람에 프랑스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국방상 안전지대라고 하여 강화도에 보관한 것인데, 너무 어이없이 빼앗겼으니 더욱 그러하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정족산 사고(史庫)와 전등사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 같이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만큼 지금으로부터 c134년 전에 강화도에서 벌어졌던
정족산성 전투의 의미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강화 유수가 포기한 강화성의 외규장각 도서들이 약탈당한 것과는 달리
정족산성 안에 있던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족산성 전투의 승리가 가져다준 또하나의
전과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 민족이 남긴 역사와 그에 상응하는 문화유산은 그 민족의 정체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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