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기
한국인이라면 안중근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지못한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토오를 저격했다는 것 외에 그의 삶과
행동 그리고 그를 지탱한 사상이나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이는 참으로 드물다. 식자들은 우리의
역사상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실상 연구가 부족한 대표적인 인물로 안중근을 꼽고 있다. 과연 연구의 부족 때문만일까?
근 100년전 일제의 식민통치로 기울어가는 이 땅의 암울한 현실에서 불꽃처럼 자신의 삶을 대의를 위해 던졌던 안중근.
어쩌면 우리는 그의 내면에서 솟구치고 있었던 인간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흔쾌히 던졌던 그 보이지 않는 결의와
헌신을 제쳐놓은 채 그를 이해하려고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일 양국의 자존심으로 중세사에 있어서 이순신과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있다면, 근대사에 있어서는 안중근과 이또오가 있다.
두 사람은 양국 근대사의 성격을 극명하게 대비시켜주기도 한다. 오늘 일본인들에게 이또오는 ''근대화의 원훈''으로서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안중근이란 어떻게 다가와 있는가?
2. 안중근과 삶의 발견
19살이 되던 해에 안중근은 황해도 마렴공소(麻簾公所)에서 프랑스인 신부 홍석구(洪錫九, J. Wilhelm)로부터
토마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받았다. 아버지 안태훈(베드로)과 3년전에 결혼한 아내 김아려(마리아) 등 가족과 계부에
이르기까지 일가 친척이 모두 함께 입교했던 것이다.
영세를 받은 안중근은 홍 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에 교세를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894년 4월 신천에 청계동(淸溪洞) 본당이 축성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안중근은 홍 신부를
따라 해주, 옹진 등 황해도 지역의 공소를 순회하며 교리를 가르쳤으며, 이웃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고 내 일처럼 처리해주기도
하였다. 안중근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삶은 기도에 힘입은 강한 실천 그 자체였다.
평신도로서 안중근은 자신의 삶을 열심한 교회의 활동 속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신천에서 지역교회의
발전에 힘을 쏟는 한편 조선에 대학을 세워야 한다고 수 차례나 서울의 민(閔, Mutel) 주교를 찾아가 청원하기도
하였다. 그가 애쓴 바는 지역사회를 넘어서 점차 조국과 민족의 문제로 연결되어졌다.
그런데 사형직전에 집필했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이 세상에서 주는 상벌은 한정이 있지만 선악에는 한이 없는 것이오.…원컨대 우리 대한의
모든 동포형제자매들은 크게 깨닫고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허물을 깊이 참회함으로써 천주님의 의자(義子)가 되어 현세를
도덕시대로 만들어 다같이 태평을 누리다가 죽은 뒤에 천당에 올라가 상을 받아 무궁한 영복을 함께 누리기를 천만번 바라오.
라고 말하고 있듯이 신앙에 열심한 가운데 안중근은 교리와 신학적인 지식에 힘입어 영성을 심화시켜 나갔던 것 같다.
정하상(丁夏祥, 1759-1839)이 저술한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잇는 조선적인 교리와 신학의 모색, 그리고 마리아
신심에 이르는 흔적들이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신앙은 세상을 보고 민족의 문제를 깊이 있게 인식하는 창구이자 원동력이었다. 안중근은 당시 프랑스 외방전교회 소속의
홍 신부와 천주교회를 통해 세계의 정세를 파악하고 조선의 처지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익힌 한학에 능하면서도
신학문에 발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안중근은 말하자면 당대의 신지식인이었다.
안중근은 삼서삼경이나 ≪자치통감(資治通鑑)≫과 같은 동양의 고전이나 역사에 해박했는가 하면, 영어, 일어, 프랑스어,
러시아 등 적어도 5개국어를 습득하고 있었다. 그가 읽은 동서양의 책 가운데 큰 영향을 주었던 한 권의 책이 있었으니,
그것은 나중에 김구(金九) 선생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 근대유럽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맥캔지 저술의
한역서인 ≪태서신사(泰西新史, A History of The Nineteenth Century)≫였다. 한 권의 책이
개인의 일생을 좌우한 예를 안중근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신앙에 입교한 이후 안중근은 자신의 삶을 민족과 사회의 문제에 접목시켜 나갔다. 안중근의 나이 26세 되던
해인 1905년. 그해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안중근은 보다 적극적인 국권수호운동을 모색하게 된다.
3. 교육과 정의를 위한 투신
1905년 겨울 안중근은 잠시 중국의 산동과 상해로 가서 각국의 신문과 잡지 등을 읽고 고심하던 중 그곳에서 만난
르각(Le Gac, 郭元良) 신부님의 권고도 있어 다시 귀국한 뒤 이듬해 봄에 진남포에서 교육사업에 투신하였다. 당시
국내에서 전개되었던 이른바 애국계몽운동에 몸을 담은 것이었다. 안중근은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설립했는가
하면, 평양에서는 광산회사인 삼합의(三合義)를 경영하였다. 그리고 당시 온 나라에 불길처럼 퍼져나갔던 국채보상운동의
관서지부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관서지역의 60여개 학교가 모여서 벌였던 연합경기에서 일약 1 등을 차지하여 그의
지도력이 돋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군대해산을 지켜보고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활동공간을 해외로 옮겨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현실적으로 가장
우선적인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던 것이다. 안중근은 뛰어난 사격술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초패왕 항우(項羽)와
같은 기상을 지닌 대장부였다. 그보다 나이가 서너살 위였던 김구도 ≪백범일지(白凡逸志)≫에서 안중근의 집에 거쳐할
당시 보았던, 영기가 발랄한 동방총을 멘 안중근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제 쾌남아 안중근이 선택할 길은
무력투쟁으로 일제의 침략을 경고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함경도를 거쳐 연해주로 들어갔던 안중근은 1908년초에 노령땅 한인촌에서 약 300명의 의병을 조직하였다. 그해 6월
10일 두만강을 넘어선 안중근 부대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1만명의 일본군과 13차례에 걸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안중근은 함경도 경흥의 신아산 부근에서 생포한 일본인 포로를 놓아준 것이 화근이 되어 역습을 받아
부대는 와해되고 자신은 일주일 동안이나 기아선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른 적이 있다. 이때에 그는 매일 하느님께
대한 예배와 기도를 잊지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옥중생활에서도 그렇다. 그는 매일 조석으로 정성껏 하느님께 기도하고
찬미를 드렸다.
그러나 안중근은 절실한 무엇을 찾고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이미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 간절한 원의를
허락하신 터였다. 1909년 9월 어느 날 노에키에프스크를 떠난 안중근은 브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10월 23일
그곳에서 <원동보(遠東報)>에 실린 하나의 기사가 섬광처럼 들어왔다. 이또오가 얼마있지 않아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안중근은 처음으로 이또오의 사진을 접했다.
그는 몇 사람의 한인동지들을 만나면서 거사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굳혀나갔다. 소문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한다는 말도
있고 채가구를 거쳐 하얼빈으로 간다는 말도 들렸다. 안중근은 채가구와 하얼빈 두 곳으로 거사지점을 압축하였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안중근은 거사를 위해 삼등열차에 몸을 실었다. 러시아 땅에서 중국으로 가는 동안, 그의 머리
속에는 이또오를 실은 특별열차가 과연 채가구(蔡家溝)에서 정차할까 아니면 하얼빈에서 정차할까 하는 생각만이 맴돌고
있었다.
훗날 사형에 앞서 홍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볼 때, 안중근은 이런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노령에서 의병에 투신한 당야의 기몽이었다.…홀연히 찬연한 하나의 무지개가 구천에 걸렸는데,
그 번쩍이는 일단이 나에게 접근하면서 곧 머리위에 현사(睍射)하려는 찰라에 다시 출현한 성모 마리아가 그 묘한 섬수를
펴서 나의 흉간을 위무하면서 ''놀라지 말라 염려해서는 안된다''는 분부와 함께 다시 황홀하게 사라지셨다.(<통감부로
보내는 園木末喜의 보고서>, 1910. 3. 15)
브라디보스토크에서 방에 누워 잠시 잠이 들었을 때 안중근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은 그의
마음의 결의를 알고 계셨고, 그래서 그의 불안을 위로하셨던 것이다.
거사 직전, 열차가 종착할 역인 하얼빈과 그곳에 이르기 전에 꼭 한 번 정차할 수 있는 지점인 채가구를 동지 우덕순과
함께 답사했던 안중근은, 처음에 채가구를 맡기로 했지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 우 동지에게 서로 바꾸어 자기가 하얼빈을
맡겠다고 하였다. 사격솜씨가 월등하기도 했지만 반드시 채가구에 선다는 보장이 없지 않는가? 안중근의 마음 가운데 그러한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10시.
역사적인 그날, 기차는 채가구에 서지 않은 채 30분이 지나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초조하게 열차를 기다리던 안중근이
채가구에서 일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고 역을 떠나 걸어나가고 있을 때 저편에서 기차소리가 들려왔다. 안중근은 바로
발길을 돌려 대합실을 거쳐 플래폼으로 뛰어갔다. 이또오가 기차에서 막 내려 러시아군의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안중근은 품에 간직하고 있던 신식 부라우닝 권총을 꺼내어 이또오를 향해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우라 꼬레아! 비브라 꼬레아! 대한 만세!"
순간적인 정적 속에서 두 음향만이 역전에 메아리쳤다. 조선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깨드린 장본이었던 이또오를 포살한
직후 안중근은 "이 일을 이루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성호를 그었다.
안중근은 자신의 투쟁이 결코 무력투쟁이 아니라 의로운 투쟁이었음을 기도 안에서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여순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가 일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대한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행한 일제침략에 대한 응징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안중근은
자신의 행위가 살인이 아닌 정의로운 투쟁 즉 의병으로서 행한 의병전쟁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성서의
<마카베오>에서 보는, 이스라엘을 보존하기 위해 셀류코스에 저항한 마따디아의 투쟁을 연상시켜 주고 있다.
법정 담판에서 안중근은 자신을 전쟁포로로 다루어 달라고 했으나 이는 묵살되었고 그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조 마리아의 권고도 있었지만, 안중근은 대장부답게 의롭게 죽는 것을 기쁘게 여기며 상소를 포기한 채 자서전 집필을
마치고 다만 동양평화에 관한 구상을 집필할 시간을 원했다. 그리고 그 무렵이 머지않아 부활절이 가까운 시기였으므로
자신의 사형집행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했던 부활절날로 해주기만을 희망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일제는 사형집행일을 이또오가 죽은 날의 그 시각에 맞추어 그를 위로하고자 1910년 3월 26일 10시로 정하였다.
안중근은 이 세상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한때 전교 과정에서 벌어진 시비로 소원해졌던 홍 신부님이 먼길을 와주어 마지막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안중근은 고백성사를 통해 대죄인 살인죄를 고했다. 혹자들이 안중근이 이또오를 사살했던
일을 후회한 증거라고 오해하고 있지만 이는 상등통해이지 단순한 후회는 결코 아니다. 설령 내가 의로운 일을 했다손치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 행한 의로움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인지. 안중근은 의를 실현한다는 이유로 한 생명을 죽여야
했던 것이 비록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하느님께 속죄하는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안중근의 삶을 통해, 신앙과 삶, 개인신심과 사회적 실천, 그 일체화의 이상적인 모범과 그것을 체현하였던 한
인간을 보게 된다. 당시 외방전교회가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정교분리의 원칙하에 신앙의 목적을 영혼구원에 두고 신심을
강조하던 때에, 하느님께서는 평신도 안중근에게 억압 속에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게 하셨던 것이다.
4. 평화를 위한 구상
개인은 정직해야 하고 사회는 정의로와야 한다. 안중근의 순수성에 대한 지향은 정의로 함축되어졌다.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무렵, 그는 의병 대원들에게 대세(代洗)를 주면서,
사람은 정의를 위해 살아야 하며 정의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 있는
힘을 다 바치고 이렇게 정의를 위해 죽는 것이니 무슨유감이 있겠습니까? 이제부터 육체로 인간 세상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이미 그 능력을 잃은 것이지만 영혼으로 천국의 사업에 이바지 할 수는 있는 것이 아닙니까?(滄海老紡室,『安重根傳』)
라고 한 적이 있다. 사람을 죽인 행위가 비록 교리상으로 죄악일지라도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고 생각한 안중근은 정의의 대한 자신의 확신이 가톨릭 신앙에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일찍이 안중근은 사회는 부패없는 백성이 주인이 되어야 하고 자유민권을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한 적이 있다. 그러한 사회라야
평화로운 ''도덕시대'' 혹은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08년 3월 21일자 <해조신문(海朝新聞)>에
투고했던 ''인심이 단합하여야 국권을 흥복하겟다''에서는 한국사회가 교만과 교오에 따른 불합병에 걸려있다고 진단하고,
"여보시오 우리동포. 자금이후 시쟉?여 불합이자 파괴?고 단합이자 급셩하여…대한뎨국 만만셰를 륙 부쥬 흔동?게
일심단톄 불너보셰."라고 말하고 있다. 거사 10일 후인 1월 6일 여순 법정에 제출한 <한국인안응칠소회(韓國人安應七所懷)>에서는
사해동포의 형제애를 강조하면서 정의를 확장하여 세계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외치고 있다.
안중근은 자신의 생각을 사형이 언도된 직후에 ≪동양평화론≫으로 집필하려고 했었다. 그 전체 구성은 서문(序文)과 전감(前鑑)
외에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이었으나 앞의 두 부분만을 쓰고 나머지는 쓸 시간이 없었다. 여기에서
안중근은 경쟁적인 기계로써 살육과 전쟁으로 점철되고 있는 현실을 경고하고, 지역이나 인종에 대한 편견, 산업과 무기제조를
경쟁에 이용한 현실을 단호히 규탄하였다. 산업과 기계가 전쟁의 도구로 변질된 문명의 왜곡 그 자체가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동양평화론≫에서 안중근은 무엇보다 동양 각국의 자주 독립과 평화의 실현을 주장하고 있다. 즉 한국독립을 명백히 하면서
한·일·청 3국이 동맹하고 세 나라의 국민이 상호협력하여 동양평화를 이루고 나아가 유럽을 포함한 세계평화에 동참하자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위험하니 노일전쟁시 중국과 한국이 함께 도왔던 것을 상기시키며, 오히려 전쟁을 빌미로 양국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대륙의 조차에 열을 올리고 있는 일본에 심각한 우려를 보내고 있다. 안중근은 동양 3국은 반목이나 침략을
버리고 상호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문화적으로 인종적으로 3국은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서로가 경원시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안중근이 생을 마감하기 전에 완성하고자 했던 ≪동양평화론≫은 미완으로 그치고 말았다. 일제가 요청했던 사형집행 기일을
연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하찮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놀라운 일을 하시듯이 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아니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이들을 통해 전해진다.
동양평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했던 안중근의 꿈을 일제는 외면했지만, 그는 끝내 사형이 집행되는
그날까지 구술로라도 그 구상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형무소측에 간절히 부탁하였다. 당시 통감부의 통역관으로 여순
형무소에서 근무했던 소노끼(園木末喜)는 죽으면서 딸에게 "언젠가 크게 공개될 날이 있으니 잘 간직하라"는
유언과 함께 당시에 그가 받아적었던 구술기록을 전해주었다.
그후 수십년이 흐른 뒤 그의 딸 소노끼(園木淑子)는 이 자료를 1989년 세상에 공개하였다. 구술자료에는 "안중근은
옥중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지니고 있던 뜻을 발표하지 못하고 단두대에 오르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등법원장(白石)이
옥중으로 안중근을 찾고, 안중근의 뜻을 듣기로 했다. 고등법원장이 형무소 안으로 죄수를 찾아가 그 죄수의 발표를 듣는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안중근의 뜻이란 곧 동양평화론이었다.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제쳐놓을 수 없어 적어본다"라는
통역자의 코멘트가 적혀 있다.
안중근은 당시 일본이 청일전쟁 후 지배하고 있던 여순항을 중국에 돌려주고 대신 여순에 상설 동양평화기구를 창설하자고
제안하였으며, 아울러 한·중·일 3국이 참여하는 공동금융기구를 만들어 공동으로 경제발전을 도모할 것을 주장하였다.
중국의 최대항인 여순을 일본이 반환해 중국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고 반환조건으로 중국은 여순을 자유시로 개방하여
일종의 치외법권지대화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순이 자유시가 될 경우에 각국의 불리한 문제를 상호 토론하며 이로써
영토를 반환하고 전쟁을 막는 길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안중근의 구상에는 여순을 자유시로 한 다음에 동양삼국이 금융기구를 창설하여 국채를 발행하고 약화된 나라를 타국의 원조로
재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안중근은 3국 정부의 요로에 있는 사람을 회원으로 모집하여 동양평화의 항구적 방책을
강구하게 하고 나아가 회원국으로부터 회비를 징수하여 그 징수액의 반으로 일본의 문란된 재정을 정리하여 더 이상 침략을
중단하게 된다면 한국과 중국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은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서 국제적인 시각에서 동양평화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오늘날 EU와 같은 지역공동체를
이미 90여년전에 동아 3국에 적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안중근이 구상했던 동양평화론은 시대를 앞서, 동양인 아니 세계인의
이상을 담고 있었다. 죽기 직전의 안중근에게는, 개인의 정직, 사회의 정의, 그리고 세계의 평화는 하나의 문제였다.
모든 것이 평화안에 있었다.
5. 마치기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유일한 혈육인 손자 안웅호(安雄浩) 씨가 말하고 있듯이, 안중근은 "균형의 의미를 가르쳐준
진정한 낭만주의자의 화신"이었다.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로 평화의 길을 발견하고 인간 삶의 현실에서 일생을
바쳐 온몸으로 씨름한 인물의 표상이었다. 억압받고 버림받은 사람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놓았던 안중근, 그의
일생은 예언자로서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잠시의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그분께로 돌아갔다. 그때 나이 3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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