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014
일 자
2003.07.20 18:47:46
조회수
2269
글쓴이
관리자
제목 : 한국전쟁의 국민총화 정신 (국방일보)



제목 : 한국전쟁의 국민총화 정신

저자 : 군사편찬연구소장 하재평

수록 : 국방일보,2001.06.14


c 1950년 6월 25일 직전 3개월은 김일성의 숨가쁜 군사외교 협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3월 30일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에게 3단계 남침공격계획 작성 제의를 하였고, 5월 15일에는 선제공격계획이 완료되자 모택동이 이를 찬성하였으며, 미군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도 병력을 파견하여 돕겠다는 약속까지 얻어냄으로써 힘을 받은 김일성은 소련의 무기가 도착되어 전투준비가 완료되는 6월 25일을 남침공격 개시일로 결정하였다.
c이처럼 한국전쟁은 소련이 치밀하게 남침 전쟁계획을 발전시켜 북한군이 잘 훈련된 부대로 편성하고 제병협동작전 능력과 현대전 수행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전 준비된 전쟁이었다. 51년전 그날 이 땅위에서는 한민족 5천년 역사이래 가장 많은 국가인 25개국 약 150만명(1951년 12월 기준)의 군인이 ''국제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950여회라는 외침을 받았지만,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 동안 전개된 한국전쟁에서처럼 방방곳곳을 전장터로 삼아 이처럼 많은 인원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룬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는 우리 민족사를 뛰어넘어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전쟁이었고, 그 기원과 성격 또한 규정하기가 어려워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내전, 음모론, 함정설, 남침유도설, 북침설, 국제적 내전, 수정주의, 전통주의, 그리고 최근의 ''고개숙인 수정주의''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원인과 성격을 놓고 세계 유수의 학자들이 제각기 이론과 학설을 내세우며 최근까지 논쟁을 벌였던 것이 바로 한국전쟁인 것이다.

c미국의 1개주보다 작은 한반도에 25개국에서 파병된 국가들이 치뤘던 전쟁은 그 참전국의 규모면에서 세계대전에 버금가는 국제적 내전이었고, 피해면에서도 한국군 62만명, 유엔군 16만명, 북한군 93만명, 중공군 100만명, 민간인 피해 250만명, 이재민 370만명, 전쟁미망인 3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이산가족 1,000만명은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명을 고려할 때, 그 절반을 훨씬 넘는 약 1,800여만명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이 전쟁의 참혹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내전이라는 측면에서 그 궤를 같이하고 있는 미국의 남북전쟁(Civil War)도 5년 동안 희생자는 인구 3%에 해당하는 100여만명이었고, 2차 대전시 최대의 피해를 입었던 유럽도 인구의 10%인 3,000만명의 인명손실을 입었을 뿐이다.

c또한 한국전쟁은 ''밀물과 썰물'',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싸우는 전선과 휴전천막'', ''38도선에서 휴전선까지'' 그리고 ''잊혀진 전쟁'' 의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낙동강과 압록강을 오가면서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중에 한편에서는 정전회담을 하는 등 상반된 전투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전쟁이었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38도선에서 시작된 전쟁은 38도선상에 연하는 휴전선에서 50년이라는 분단의 아픔을 남겨 놓은 채 역사의 동면상태로 들어갔고, 이러한 영향을 받아서인지 오늘날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전후 세대들은 ''잊혀진 전쟁''을 넘어 아예 ''관심없는 전쟁''으로 행동들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는 세대간의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을 느낀다. 오늘 우리 기성세대들이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전쟁의 뼈아픈 교훈으로 남겨 주고 싶은 메세지는, "전쟁에서 희생의 대가로 승리하는 것 보다, 어리석은 전쟁을 다시는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소년지원병도 노무자도 전선으로

c51년전 한국전쟁은 정규군만으로는 전쟁을 치룰 수 없는 치열한 전쟁이었고, 또 戰場(전장)도 전후방이 없이 독일의 루덴도르프가 말한 전형적인 총력전 형태의 전쟁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북한군은 소위 현대전을 치룰 수 있는 능력과 수준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중국내전에서 단련된 ''조선의용군''의 북한군 편입과 소련의 전쟁지도와 함께 최신장비로 무장하여 초기 준비없는 한국군과 북한군을 우습게 여긴 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하였고, 이는 결국 2차대전 초기의 유럽전선에서의 덩케르크를 연상케 하듯, 한국군과 유엔군을 낙동강 방어선으로 단기간에 밀어부쳤던 것이다.
c세계 역사상 국난을 당해 정규군과 함께 이를 극복한 조직 및 단체로는 영국·미국·스위스의 민병조직과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예비군 제도 등이 있긴 하지만 , 한국전쟁시 우리 민족 처럼 전 연령층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다양한 조직을 결성하거나 자원입대를 통해, 혈전(血戰)의 현장으로 달려간 민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수 없이 많은 외침을 받았던 우리 민족의 생존적 본능에서 나온 민족저항정신이 역사의 흐름속에서 면면히 흐르는 가운데 의병과 독립군 정신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한국전쟁에서 국민총화정신의 굳은 신념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숭고한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c여기에는 소년지원병으로 군번도 계급도 없이 14세부터 17세까지의 어린 학생들로 구성하여 낙동강 방어선에서 손실 보충병력으로 투입되었는데 3,000여명 중 82%인 2,460여명이 희생되었다.
학도의용군 또는 학도병은 30여만명이 참가하여 이중 5만여명이 여러 전선에 투입되어 7,000여명이 희생되었고, 미군의 복장에 한국군 계급장을 달고 싸운 카투사는 인천상륙작전에서 최초로 18,000여명이 투입되었으며 기간 중 43,600여명이 전투에 참가하여 27% 12,000여명이 전사하였다. 일명 보국대 또는 지게부대로 불렀던 노무자는 탄약 운반 등의 다양한 노무 활동으로 30여만명이 전선을 지원하여 7,000여명이 희생되었다. 최소 10만명의 미군 병력 추가 파병을 절약한 셈이었다. 국군 및 유엔군 통제하에 조직된 유격대는 백골병단, 호림부대, 레오파드 부대 등 40여개 단체가 정규작전을 지원하였는데 50,000여명중 5,000여명이 전사하였다.
c대한 청년단은 250여만명의 우익청년들로 구성되어 모병업무, 군의 예비전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국립경찰은 정규전 참여와 공비소탕 작전에서 60,000여명 중 40%인 23,000여명이 희생되었으며, 여군들도 여자 의용군, 간호, 유격대, 선무활동 등 1,000여명이 자원 입대하여 지원하였으며, 지역별 주민의 무장 반공 투쟁, 그리고 예비전력화를 위한 60여만명의 국민방위군이 중공군 개입 당시 후방지역으로 소개되는 등 다양한 참전 단체들이 당시 상황에 맞게 자발적으로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누란에 처한 국가를 구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민족저항정신이 국민총화정신으로

c한국전쟁중 가장 어려운 시기인 낙동강 방어 및 1.4후퇴시에 대부분 참가했던 여러 참전 단체들은 프랑스가 영국간의 백년전쟁중 어린 소녀 잔다르크가 행한 애국적 희생정신이 프랑스를 구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리의 역사적 저항정신과 상무정신으로 무장한 국민총화정신이 최후의 보루로서 민족적 생존을 지켰기에 반만년 역사상 최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회생(回生)시킨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c6.25와 같은 전쟁이 더 이상 이 땅에서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리고 역사를 반추(反芻)해 볼 때, 전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원인제공도, 환경조성도 바로 그 주체는 우리들 자신에 있다. 우리 선조들은 조선시대 200년간의 평화로운 시대에 군비를 소홀히 하고, 오직 정권획득을 위한 당파싸움에만 몰두한 나머지 결국 임진왜란을 자초하였다. 6.25 전쟁도 완전 무방비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당했으니, 두 번에 걸쳐 민족적 비극을 되풀이 한 것은 후세에 전달하는 역사가 주는 감계(鑑戒)가 부족하여 국방의 소홀함과 안일한 대비태세로 이어졌음을 감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c그러기에 오늘날 국방이 갖는 국가의 힘은 변화를 순발력있게 관리하는 지역별 분권화된 책임자의 의지와 실천이며, 대(大) 희생을 치룬 역사의 뼈아픈 교훈을 거울삼아 미래를 확고하게 준비하는 집권화된 의사 결정자의 장기적 비젼과 전략의 발휘에 있다. 참으로 군사(軍史)가 주는 역사적 교훈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 만명의 희생의 대가를 치룬 위에서 도출된다는 점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게 사용되어야 하며, 가장 어려운 변화의 시대에 요구되는 국민총화정신에 힘을 실어주는 정신적 기반에 있는 것이다.
c단재(丹齋) 신채호 선생이 민족정신(민족혼)을 칼에서 가장 중요한 ''칼날''에 비유하여 민족저항정신을 강조하였는데, 바로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에 나타난 시대적·역사적 정신이며, 그리고 한국전쟁시 국민 모두가 참여한 국민총화정신으로 발휘되었다.
이는 전쟁 역사가 주는 민족의 교훈으로, 앞으로 남북한간의 화해와 협력을 다지고 평화의 역사를 추구하는 정신으로써 우리 모두의 관심과 노력을 통하여 성취되기를 기대해 본다.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한국전쟁을 통해 본 일본의 두 얼굴 (국방일보)
이전글 자주국방과 전력증강 (국방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