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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7 10: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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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22>
<22>동티모르 상록수부대 파병 (하)
[평화 유지에 주민들 `다국적군의 왕' 찬사 / 2011.06.07]

학교를 방문한 한국군을 향해 환호하는 동티모르 초등학교 어린이들 모습
지역 화합의 날 행사를 주선하고 있는 상록수부대원과 참가한 주민의 모습

건군 이래 두 번째 전투부대 파병이었던 420명 규모의 동티모르 파병 절차는 쉽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확고한 파병 의지를 밝혔지만 국회를 중심으로 찬반 주장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진통 끝에 파병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국방부는 국회가 파병을 동의한 다음날인 9월 29일, 제522평화유지단을 창설하고, 부대의 별칭을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로 정했다.

▶동티모르 라우뗌 지역 전개

한국은 1991년 9월, 유엔 회원국이 된 이후 소말리아·서부사하라·앙골라 등 3차례의 평화유지군 파병 경험을 갖고 있었지만 동티모르 파병은 앞서 있었던 3차례의 파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안이었다. 이전의 파병은 전투와 직접 관련이 없는 파병이었지만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는 현지의 저항세력과 충돌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파병되는 전투부대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1965년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그때는 모든 지원을 미군이 제공했다. 따라서 상록수부대의 파병은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최초의 전투부대 파병과 다름없었다. 다행히 다국적군을 주도하는 오스트레일리아는 동티모르의 인접국으로 비교적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고 참가국들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참가국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정기간 적응훈련을 마친 후 현지에 전개할 것을 권유했다. 준비가 부족했던 상록수부대는 미비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제안에 따라 국내에서 파병 준비를 마친 상록수부대 본대는 10월 4일, 서울공항을 출국해 오스트레일리아 타운스빌(Townsville)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지도 및 안내로 2주간의 적응훈련을 마쳤다. 그 사이에 동티모르의 맨 동쪽 라우뗌(Lautem) 지역을 책임지역으로 선정했다. 그곳은 적대세력의 위협이 비교적 적은 곳이었다.

이어 10월 16일, 선발대가 다국적군사령부에서 제공하는 수송기편으로 현지에 전개했다. 주둔지는 방치돼 있던 과거 인도네시아군 주둔지를 선정해 24인용 천막 24동과 각종 시설을 설치했다. 이어 영국군 용병 쿠르카소대로부터 작전 지역을 인수하고 지역 주민들에게는 한국군 주둔을 통보하면서 협조를 요청했다. 제한된 치안유지작전에 나선 선발대는 지역 주민이 억류하고 있던 49명의 민병대를 석방시켜 귀향 조치하는 등 주민과 민병대 간의 화해를 주선했다.

상록수부대가 전개하기 직전까지 라우뗌 지역에는 1000여 명에 가까운 민병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국적군의 전개 소식에 그들의 대부분은 서티모르로 도주하거나 은밀한 곳에 숨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본대가 10월 22일 전개를 완료하면서 지역 내의 치안 상태는 빠른 속도로 안정을 회복했다. 상록수부대는 화해 및 난민 복귀 지원 등 평화유지활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확대할 수 있었다.

▶다국적군에서 평화유지군으로 전환

유엔의 평화유지활동(Peace Keeping Operation)은 헌장 제6장에 근거해 분쟁 지역에서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중립적인 입장에서 비무장 또는 최소한의 무장으로 수행하는 국제경찰활동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소극적인 조치로는 동티모르와 같은 분쟁 상황을 조기에 안정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헌장 제7장을 근거로 유엔이 인정하는 다국적군을 파병해 평화강제(Peace Enforcement)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다국적군은 파병 비용을 참가국이 부담하며 협의체를 구성해 활동한다는 점이 유엔평화유지군과 다른 점이다. 6·25전쟁, 걸프전, 소말리아 등이 유엔이 승인한 다국적군 형태였다. 따라서 동티모르 상록수부대도 우리나라가 경비를 부담해 가며 오스트레일리아가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파병된 것이다.

2000년 초부터 동티모르 사태가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되자 유엔은 치안 상태가 회복된 지역부터 평화유지군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2000년 2월 1일부로 상록수부대가 포함된 동부 지역이 가장 먼저 평화유지군으로 전환됐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이 맡고 있던 사령관도 유엔이 지정한 필리핀의 산토스 중장으로 교체됐다.

평화유지군으로 전환된 상록수부대는 유엔 마크를 부착하고, 푸른색의 유엔 베레모를 착용하게 됐다. 차량 등의 장비에는 백색 바탕에 검은 글씨로 UN을 표기했다. 그때부터 장병의 급료를 포함한 모든 경비를 유엔이 부담했다.

▶암베노 이동 전개·활약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경비가 소요된다. 따라서 유엔은 분쟁 지역의 안정이 회복될 경우 즉각 평화유지군 감축에 착수한다. 동티모르 유엔군 역시 경비 감축을 위해 규모를 줄이기로 했다. 따라서 가장 먼저 안정된 지역의 상록수부대가 철수 순위 1번이었다. 그러나 상록수부대는 현지 주민들로부터 ‘다국적군의 왕’이라는 절대적인 호응을 받고 있었으며, 유엔군사령부에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군을 철수시키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반면 암베노 지역의 요르단군은 주민과 상당한 불화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사령부는 요르단군을 철수시키고 그 자리에 한국군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매우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암베노(Ambeno) 지역은 특이한 곳이었다. 동티모르의 서쪽 국경으로부터 70㎞ 지점 인도네시아령 서티모르 지역에 위치한 817㎢ 넓이의 고립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곳이 동티모르의 영토가 된 것은 포르투갈이 티모르 섬에 최초로 상륙한 곳이었고 주민 또한 동티모르인과 더 가까운 종족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곳은 일부 해안선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척박한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주민의 생활 여건이 매우 열악했다.

상록수부대가 2002년 1월 13일부로 암베노의 작전 책임을 인수했을 때 적대세력의 활동은 거의 종식돼 있었다. 따라서 주 임무는 116㎞에 이르는 국경선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상록수부대는 추가적으로 주민의 자립정신을 기를 수 있도록 한국형 새마을 사업을 전개했다. 아울러 지역 내 초·중·고등학교 학생과 교사, 언론인 등 100여 명을 초청 2박 3일간의 국토순례 대행진으로 그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심어 주는 등 지역 주민의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대민사업을 전개했다. 이 같은 상록수부대의 활동은 그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파병 성과·교훈

상록수부대가 2003년 10월 철수할 때까지 동티모르에서 활동했던 4년간은 한국 정부와 군에도 귀중한 기회였다. 유엔 회원국이 된 이후 최초의 전투부대 파병으로 군의 국제화 및 세계화를 위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양한 작전환경과 여건하에서 임무수행 능력을 배양할 수 있었으며 유엔은 물론 오스트레일리아 등 관련국과 군사외교를 통해 국가의 이미지를 고양할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부담도 없지 않았다. 2003년 3월, 차량으로 이동 중이던 5명의 장병이 홍수에 휩쓸려 희생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사고 과정에서 희생자들이 발휘한 투철한 사명감과 전우애는 모두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해외파병 지역의 자연환경에 더욱 철저히 대비하고 유의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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