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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14: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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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02>
국난 극복사<2>삼국통일의 원동력
[국민과 지도자 힘 하나가 되다 실사구시 외교 연합전력 도모 수대에 걸쳐 국가적 역량 쌓아 / 2011.05.19]

북한산 진흥왕비의 모습 사진
한반도의 심장부인 한강 일대 사진

후발국 신라가 선진국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거둔 승리는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백제는 무리한 외치와 대숙청에다 팽배한 염전사상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고, 강한 군사력으로 삼국의 맹주를 자처하며 당과 맞선 고구려는 결국 독재자 연개소문의 사후 내분으로 급격히 붕괴되고 말았다. 반면, `비담의 난'을 비롯해 대내외의 시련을 극복한 신라는 끝내 통일의 주역이 됐다.

신라의 호국적 전통과 통일정신

신라는 제22대 지증왕 때 국가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증왕 4년인 503년 중신들이 모여 토의한 끝에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의 두 자를 따 국호를 ‘신라’라 하고 왕호를 ‘국왕’이라 정했다. 이는 ‘국가 대업을 날로 새롭게 해 사방 영토를 망라한다’는 통일의 의지를 담고 있어 신라의 진로를 뚜렷이 제시한 좌표나 다름없었다.

국호에 국가와 국민의 지향을 담은 일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일이다. 삼국 중 후발국으로서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정신적 저력이 이미 여기서 마련됐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소를 농경에 이용하는 우경을 도입한 지증왕은 농업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고, 당시 생산 인력에 걸림돌이었던 순장제를 폐지하는 혁신적 조치로 신라의 경제적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법흥왕은 즉위 후 4년이 지난 517년 병부(兵部)를 설치했다. 오늘날의 국방부와 같은 부서로 군사를 장악하는 최고 통수부로서 군 지휘계통을 확립한 셈이다.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잡다한 신앙으로 인해 국민 간에 공통된 정신적 안식처가 없던 상황을 정리하고 호국과 통일을 이념의 두 기둥으로 삼아 국민의 정신을 일체화한 의미가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던 화랑 출신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됐다는 사실은 신라 불교의 호국적 인과성을 잘 보여준다.

이차돈의 죽음은 불교의 영적 존재를 목숨으로 증명함으로써 불교가 국민 종교로 승화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화엄경에서 밝힌 원융회통(圓融會通)과 회삼귀일(會三歸一), 즉 사람이 서로 만나 융합해서 둥글둥글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통일한다는 생각은 신라 사회의 분파적 성향을 극복하고 통합을 지향하는 공동체적 의미와 합치됐다. 원광법사가 화랑의 도의적 수련을 위해 세속오계를 화랑(낭도)인 귀산과 취항에게 내린 것도 그렇다. 젊어서는 화랑, 늙어서는 불교에 귀의해 화랑도와 불교는 혼연일체가 됐고, 국난이 닥쳤을 때마다 호국의 지주가 됐던 것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

진흥왕대에 삼국통일의 기반이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40년 겨우 7살의 나이로 즉위한 그는 12세에 섭정을 폐지하고 친정을 한 영특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이사부(異斯夫)와 거칠부(居柒夫)라는 명신하가 있었다. 즉위 6년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인 진흥왕은 ‘치국사’라는 관청을 설치해 전국의 석학 40여 명을 모아 국사편찬사업을 추진했다. 국사의 편찬은 나라의 융성과 국가 발전을 위해 국왕이 국민들에게 역사의식을 체득시켜 국민적 일체감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왕은 진두에 서서 군비 확장에 힘썼고, 문무를 겸비한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기용해 내치와 외치 모두에 심혈을 기울였다. 진흥왕은 신무기의 개발에도 힘을 쏟아 558년 포노(砲弩)를 제작했다. 550년에는 이사부에게 군대를 줘 고구려와 백제가 각축하던 지금의 충청도 일대인 도살성과 금현성을 함락시킨 이래 북으로 한강, 동으로 가야 쪽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로써 신라의 국경이 사방으로 크게 확장됐는데 ‘진흥왕 비’는 그때의 일을 잘 전해주고 있다. 경남 창녕의 창녕비, 북한산의 북한산비, 함남 황초령의 황초령비, 그리고 함남 이원군의 마운령비가 그것이다.

진흥왕의 치적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차지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양대 강 유역의 인·물적 자원은 신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됐다. 특히 한강 일대의 점유로 고구려·백제 양국의 진출을 억제시키는 한편, 외교·문화에 있어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통로로 해로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신라는 대중국 교통의 관문으로 남양만에 당항성을 수축했다.

신라의 한강 장악은 551년 백제와 연합군을 형성해 고구려군을 몰아내고 한강 일대를 분할한 것이 시작이었다. 백제는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의 죽령 이북과 강원 고현 이남의 10개 군을 점령했다. 그후 553년 7월 거칠부 등 휘하 장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하류를 기습 점령함으로써 한반도의 심장부(heartland)를 완전히 장악했다. 신라의 배신에 분노를 느낀 백제 성왕의 침공을 554년 관산성에서 물리치고, 577년 10월에는 위덕왕의 침공군을 변경 지역으로 몰아낸 후 신라는 한강의 완전한 맹주가 됐다. 결코 신라는 한강 일대를 다시 내놓지 않았다.

이렇듯 대륙과 자웅을 겨룬 고구려와 비옥한 국토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백제를 제치고 신라가 웅비한 힘의 원천에는 진흥왕 스스로가 국가 제도화한 화랑도가 있었다. 화랑도는 최치원이 난낭비서(碑序)에서 말했듯이 ‘나라의 현묘한 도’로서 신라의 발전과 삼국통일을 견인하는 인재의 산실이자 등용문이었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교훈

군사적으로 삼국 간 ‘힘의 균열’은 외교에서 비롯됐다. 신라는 대당 외교에 성공해 군사적으로 연합전력을 형성함으로써 우세를 점했다. 고구려의 구원외교에 실패한 김춘추는 당으로 직접 건너가 군사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다. 650년 이후 막바지로 치닫던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에서 김유신은 신라군을 무한 전진으로 이끌며 전장을 누볐다.

신라의 승리는 지도자의 리더십과 통치력, 그리고 이를 따른 전 국민의 총력 태세가 일군 결과였다. 통일의 대업은 무열왕 김춘추가 재위 7년 만에 돌아가자 부왕의 유업으로 문무왕에게 계승됐고, 상하가 영명한 선왕을 여읜 슬픔을 씻고 신왕을 중심으로 일치 단결했다. 70을 훨씬 넘긴 노령의 김유신도 왕의 특명에 수명하며 꿋꿋하게 전장을 지켰다.

그러나 당(唐)은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평정되자 한반도 병탄정책을 노골화했다. 신라는 비장한 결심 하에 대당 항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무열왕 김춘추가 당으로 가서 군사협정을 맺을 때 ‘영토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한 당의 입장과는 전혀 다른 배신 행위였기 때문이다. 무려 8년간 계속된 이 전쟁은 문무왕 17년인 677년까지 70여 차례의 전투로 이어졌다. 675년 매소성 전투에서 신라는 원술의 활약으로 대승을 거뒀고, 이듬해 11월 기벌포 전투에서 22회에 걸친 혈전 끝에 제해권을 장악해 당군의 야심을 완전히 제압했다.

신라의 통일은 영토적으로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누대에 걸쳐 축적해 온 국가적 역량과 ‘실사구시 외교’를 통한 연합전력의 운용, 그리고 지도자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 일궈 낸 역사상 위대한 업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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