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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1 14: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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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05>
국난 극복사<5>백제 최후와 황산벌 전투
[`700년 왕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다 / 2011.06.09]

백제군과 신라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황산벌 사진(상단 위), 낙화암 전경 사진(하단 왼쪽), 백제 의자왕의 묘 사진(상단 왼쪽)

백제의 의자왕은 집권 초기부터 부왕의 유업을 잇고자 신라 침공에 몰두했다. 그리고 정치적 반대파를 숙청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정치적 내홍이 거듭되자 미구에 왕조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게 됐다.

▶ 의자왕, 왕조의 마지막 불꽃 태우다

즉위 이듬해인 642년 의자왕은 신라의 요충지 대야성 등 40여 성을 점령하며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한편 외교에도 탁월한 감각을 보였다. 왕은 재위 12년까지는 당과 공존을 모색했고 왜국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적대적이던 고구려와는 수대의 원한을 풀고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648년 당과 적극적인 관계를 모색하던 신라가 군사동맹을 성사시켰다. 이로 인해 선왕인 무왕 때부터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백제의 입지가 많이 축소됐다. 결국, 백제는 652년의 조공을 끝으로 당과의 외교관계를 중단하고, 대신에 653년 ‘신라 -왜 군사동맹’(647)으로 단절했던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열왕이 즉위(654)한 이듬해 1월 의자왕은 고구려·말갈과 연합해 신라 북쪽 변경 30여 성을 빼앗으며 신라를 압박했다. 그러자 3월 당나라도 소정방을 앞세워 고구려를 쳤다. 658년 6월에는 설인귀가, 이듬해 3월엔 설필하력이 요동을 공격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파상적인 공세에도 신라는 근 4년이나 단독으로 공방전을 치렀고, 당도 고구려의 후방을 견제했던 것이다.

▶ `왕의 집착' 왕조 몰락 부추기다

백제의 조정에서는 당을 멀리하는 정책이 급기야 당의 침공을 불러올 것이라는 우려가 일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자만과 안일에 빠졌다. 반대파의 의견을 무시했다. 도리어 655년 태자궁을 화려하게 수축하고, 657년에는 서자(庶子) 41명을 장관급인 좌평으로 삼았다. 서동 설화가 말해 주듯 그의 어머니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고, 선덕여왕은 이모인 셈이다. 왕은 어린 시절부터 용감하고 통찰력이 뛰어났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 ‘해동증자’로 불릴 만큼 흠잡을 데 없던 그가 어머니의 나라에 의해 왕조 몰락을 초래한 실정의 장본인이 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의자왕의 백제는 겉으론 강하고 화려했다. 하지만, 정치적 갈등과 숙청의 후유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왕 자신마저도 점차 술과 여자에 탐닉한 채 정사를 멀리했다고 한다. ‘삼국사기’는 왕이 음란과 사치로 충신의 충언을 배척했고, 다른 사료에서는 ‘요녀 군대부인’과 아첨꾼들에 의해 국권이 농단됐다고 적고 있다. 왕의 실정은 많은 귀족의 등을 돌리게 해 백제를 급속히 붕괴시켰다. 좌평 임자가 신라의 김유신과 내통한 것만 봐도 그 증좌는 뚜렷했다.

▶ 나당연합군 백제를 향해 진군

659년 4월, 당이 서돌궐을 무찌를 무렵 무열왕이 원병을 청하자 그해 10월까지도 답신이 없던 당 고종은 660년 3월 육·해군 13만으로 백제를 공격하겠다고 했다. 총사령관은 소정방, 부사령관은 당에서 청병외교의 실무를 총괄하던 신라의 왕자 김인문(仁問)이 맡기로 했다. 그해 5월 신라도 군사 5만 명으로 당의 백제 공격을 돕기로 했다.

당군은 660년 6월 산둥반도와 내주 항에서 출항했다. 최단거리의 서해안으로 상륙하자 신라의 김법민이 전선 100척을 이끌고 덕물도(옹진 덕적도)에서 합류했다. 대장군 김유신이 신라의 5만 대군을 이끌었다. 수륙양면의 동서 협공이 시작된 것이다. 한강 유역이 신라의 영토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목표는 사비성, 공격 개시일은 7월 10일이었다.

7월 초 백강(금강) 입구에서 당군이 백제군 저항을 뚫고 목표를 향해 진격했다. 사태가 급해지자 의자왕은 장흥에 유배 중인 흥수(興首)에게 대책을 물었다. 그는 “백강에서 당군을 저지하고 탄현에서 신라의 진입을 차단한 후 장기전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믿지 않았다. 불화로 유배 중인 그가 선의의 제안을 할 리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 신라군이 탄현을 넘어 황산벌(충남 연산)로 진입했다. 백제군은 소수 병력으로 신라군을 막고 당군을 저지·격퇴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일본에도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작 왜군이 출정한 것은 3년 후 부흥군의 최후 일전에서였다.

▶ 아! 황산벌

의자왕은 계백에게 5000명의 병력을 주고 출전을 명령했다. 좌평 충상(忠常)과 달솔 상영(常永)도 대진했으므로 어림잡아 백제군은 1만5000명은 됐을 것이다. 백제군이 초기에 신라군보다 유리한 작전을 전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7월 9일 황산에 먼저 도착한 백제군은 유리한 세 곳을 선점하고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세 제대로 편성한 신라군은 5만 명 가운데 보급을 담당한 병력을 제외한 2만3000명이 투입됐다. 단 하루의 전투였다. 이미 반나절 동안 네 차례 접전이 있었으나 전선은 교착 상태였다. 다섯 번째 공격에서 신라군은 새로운 작전을 구사했다. 화랑 반굴과 관창 등을 앞세워 전세를 역전시키려 했다. ‘삼국사기’에는 두 화랑이 적진으로 돌격해 장렬히 전사하자 신라 군사들이 감격해 죽기를 맹세하고 싸워 백제군을 대파했다고 한다. 실제로 교착 중에 신라군은 계백군과 맞설 중군을 1만7000명으로 증원함으로써 병력의 압도적 우세를 확보했고, 그 여세를 몰아 계백군의 후면을 기습 공격했다. 마침내 백제군이 무너졌다. 계백은 전사하고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은 포로가 됐다. 이른 아침에 시작된 필사적인 전투는 오후 3시쯤에야 끝이 났다.

▶ 700년 왕조의 최후를 맞다

황산벌 전투가 한창이던 7월 9일, 당군도 기벌포(충남 장항)에 상륙해 강변의 백제군을 휩쓸었다. 그러나 연합작전에 차질이 생겼다. 신라군이 예정보다 하루 늦은 7월 11일 사비성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소정방이 ‘작전의 책임’ 운운하며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참수하려 했다. 김유신은 황산 전투의 치열한 상황을 해명하며 강력히 항의했다. 결국, 12일로 공격 개시일이 조정됐다. 백제군은 연합군의 진격에 대비하면서 수차례 당군 진영에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일거에 거절당했다.

12일, 드디어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진군했다. 성 외곽 30여 리에 구축한 백제군의 최후 방어선은 1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무너졌다. 전투를 포기하고 부소산성으로 들어간 의자왕은 성이 포위된 것을 알고 태자와 함께 공주로 탈출했다. 그러나 결국 성이 함락되자 7월 18일 되돌아와 항복했다.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삼천 궁녀의 전설을 남긴 채 700년 왕조의 백제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7월 29일, 금돌성(상주 백화산)에 머물던 무열왕이 사비성에 도착했다. 며칠 뒤 무열왕은 연합군 장병들을 위로하고 승전을 자축하는 행사를 주관하며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도록 했다.

▶ 종말의 굴욕

패전의 현실은 참혹했다. 후일 문무왕이 된 김법민은 생포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오늘,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땅에 엎드린 융은 말이 없었다. 9월 3일 의자왕과 네 아들, 88명의 장군과 1만2000여 명의 백성이 소정방에게 이끌려 장안으로 압송됐다.

얼마 뒤 피로와 화병이 겹친 의자왕은 죽어 망국의 한을 품고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다. 그곳은 다 망한 나라의 최후의 군주로 포악함과 사치·향락으로 유명한 손호와 진숙보의 묘 옆이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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