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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1 10:5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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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6>
<6>한국한국군 전투부대 베트남 파병
[주월한국군사령부 창설…건군 이후 첫 파병/2011.02.01]

한국에서 의료지원단 파병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던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베트남 북부와 중국령 하이난 섬(海南島) 사이의 통킹만(東京灣) 공해상에 정박하고 있던 미 해군함정을 8월 2일과 4일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격했다는 미국 정부의 발표였다. 양측 모두 선전포고는 없었지만 미국은 북베트남을 공식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다음날 항공모함을 급파해 그들의 군사시설을 맹폭했다. 이어 8월 7일, 미 의회가 베트남에서의 전쟁수행에 관한 전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함으로써 미국의 참전이 공식화됐다.

'통킹만 사건’이후 미국은 6ㆍ25전쟁의 경우처럼 즉각 지상군 전투부대를 파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기상의 문제일 뿐이었다. 대통령 선거 등 정치일정에 따라 파병을 늦추고 있던 미국은 65년 3월 8일 해병대 2개 대대를 베트남에 상륙시켰다. 지상군 전투부대로는 최초의 상륙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월한국군사령부 창설식에 참석해 부대기에 수치를 달아주고 있다.
초대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

한국 정부도 미국의 요청에 따라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000여 명 규모의 건설지원단을 3월 16일 사이공(현 호찌민 시)에 상륙시켰다.

이어 3월 20일 미 합참은 대통령에게 “미군 2개 사단과 한국군 1개 사단의 파병이 필요하다”라고 건의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군 전투부대 파병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 건군 이후 최초의 전투부대 파병 절차

한국 정부는 국가전략 차원에서 베트남 파병을 조건 없이 미국에 제안해 왔다. 그러나 막상 미국의 요청이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이동원 외무장관은 브라운 주한 미 대사와 협상을 통해 “①파병 병력의 상한선을 5만 명 이내로 한다 ②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한다 ③북한 침공시 미국이 즉각 출병할 수 있도록 한미 방위조약을 개정한다 ④ 파병 경비를 미국이 부담한다 ⑤한국의 남베트남 시장(市場) 진출을 보장한다” 등 5개 항의 파병조건을 제시했다.

한국 정부의 요구가 거세지자 존슨 미국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을 그해 5월 17일 워싱턴으로 초청해 최고의 예우로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한국 정부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6월 14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전투병력 파병을 요청하는 공한을 접수하고 8월 13일에는 국회의 동의를 얻어 1개 사단규모의 전투부대 파병을 결정했다.

▲ 주월한국군사령부 창설·전투부대 파병

전투부대 파병을 위해 국방부는 합참에 ‘파병기획단’을 설치했으며, 신중한 검토를 거쳐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을 파병부대로 선정했다. 또한 국방부는 9월 25일 파병부대를 통합지휘할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채명신 소장을 수도사단장 겸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한국군 최초의 통합군사령부였다.

이어 10월 9일에는 청룡부대가 남베트남에 상륙하고 뒤를 이어 11월 1일까지 수도사단이 상륙했다. 주월한국군사령부가 10월 20일 사이공에 자리를 잡은 후부터 본격적인 작전활동이 시작됐다.

▲ 전투부대 추가 파병절차

한국군 맹호부대와 청룡부대의 눈부신 활약을 지켜본 미국 정부는 1개 사단 규모의 추가파병을 요청했다. 주월사령부도 한국군의 독자적인 작전을 위해 군단급 규모의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 1개 사단의 증파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추가파병을 계기로 국가안보에 대한 미국의 지원과 함께 경제적 실익을 얻어내려 했다. 이에 따라 이 외무장관은 앞서 합의했던 한국군현대화 지원 등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선(先) 약속이행, 후(後) 증파’를 주장했다. 반면 미국의 러스크 장관은 ‘선 증파, 후 약속이행’을 주장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급해진 존슨 정부는 66년 1월 1일과 2월 22일, 험프리 부통령을 특사로 파견해 한국의 안보와 경제지원을 약속하면서 추가파병을 요청했다. 아울러 브라운 미 대사는 미국의 약속을 서면으로 보장하는 ‘브라운각서(서한)’를 보내왔다. 이에 따라 정부는 4월 15일 수도사단 제26연대를 뀌년에, 백마부대로 명명된 9사단을 10월 8일까지 닌호아(Ninh Hoa)에 상륙시켰다.

9사단의 파병에 따라 주월사령부는 예하부대의 전투근무지원을 위해 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를 창설했다. 또한 해군수송분대를 수송전대(백구부대)로 개편했으며, 근접항공지원 및 공중수송지원을 위해 공군지원단(은마부대)을 창설했다.

▲ 계속된 미국 정부의 파병요청

한미 정부가 9사단 파병에 합의한 직후인 66년 6월 웨스트모랜드 주월 미군사령관은 “한국군 해병여단을 사단으로 증편시켜 달라”는 내용을 미 합참에 건의했다. 미국 정부도 여러 경로를 통해 한국군 추가파병을 요청했다. 그해 10월 31일, 존슨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동안 존슨은 한국군 파병을 요청할 때마다 특사를 파병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다.

박 대통령은 11월 11일, 기자회견을 통해 “더 이상의 전투병력 파병은 없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67년 7월, 3000명을 추가 파병해 3개 대대로 편성된 제2해병여단을 4개 대대로 증편했다. 그때는 ‘병력의 교대를 위한 파병’이라는 명분으로 국회의 동의 없이 파병했다. 해병대가 증파된 후에도 미국의 파병요구는 계속됐다. 한국 정부도 미국의 집요한 요청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입장에 처했다.

▲ 북한의 도발과 추가 파병계획 취소

최근 들어 1ㆍ21사태, 울진ㆍ삼척 무장공비 침투 등 60년대 북한의 대남도발이 한국군의 베트남파병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김일성은 “남한의 월남파병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며, 수수방관하지 않겠다”며 북베트남의 호찌민에게 한국군과 같은 규모의 북한군 파병을 제안했다. 그러나 호찌민은 “외세에 의존함 없이 자신들의 능력으로 인민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김일성의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파병에 실패한 김일성이 66년부터 대남도발을 급증시키면서 68년 1·21사태와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울진·삼척사태를 일으켰다. 1ㆍ21사태 직후 박 대통령은 격노해 대응공격을 준비했으나, 미국의 저지로 실행하지 못했다. 또한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보다 자국의 함정과 승무원 송환에 매달렸다. 이를 지켜본 박 대통령은 거론되고 있던 추가 파병안을 취소했다. 이어 존슨은 그해 4월 호놀룰루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을 설득했으나 박 대통령의 ‘추가파병 불가’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한편 미국 정부 역시 68년 1월에 감행된 공산군의 뗏(Tet)공세 충격으로 베트남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더 이상의 파병요구도 없었다.

▲ 전투부대 파병과 박정희 정부

박정희 정부는 집권하면서부터 베트남 파병을 미국 정부에 적극 제안했다. 그러나 전투부대 파병을 계기로 미국의 요청을 수용하는 형식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파병의 대가를 서면으로 보장한 ‘브라운각서’는 외교관례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 결과 박정희 정부는 파병의 대가로 경제개발계획을 차질 없이 추진하면서 안보태세를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아울러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던 한미 동맹관계가 상호의존적 관계로 격상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박정희 정부의 파병카드는 기대했던 이상의 정치적 성과를 얻은 것이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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