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738
일 자
2011.02.22 22:02:06
조회수
3473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9>
<9>주월 한국군의 연합 및 합동작전과 군수지원
[700여㎞서 전투근무 지원 `물흐르듯' / 2011.02.22]

청룡ㆍ맹호ㆍ백마부대는 전선 없는 전장에서 북베트남군 및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과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은 책임지역 내에서 독자적 작전 통제권을 행사하면서, 미군 및 남베트남군 등과 긴밀한 연합작전협조체제를 유지했다. 그리고 또 다른 전장에서는 제100군수사령부가 700여 ㎞의 광범위한 작전 종심이었지만 지속적인 전투근무지원을 원활하게 수행했다.

전후방 구분이 없었던 베트남전쟁 환경 속에서 이들 부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전투부대의 임무 수행이 가능했을까?

항만에서 보급품을 수송하는 십자성 부대

▶ 주월 한국군사령부

현재 군은 2015년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비해 한국군 주도의 전쟁수행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모든 작전요소를 동시에 통합 운용할 수 있도록 각종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베트남에 파병됐던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역할과 기능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유엔군사령부에 있었다. 주월 한국군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벗어나 대통령의 통수권 행사 및 국방장관의 지휘·감독권이 직접 미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독자적인 중대전술기지 개념으로 작전 성과를 극대화하는 데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리고 작전 지휘 및 통제뿐만 아니라 군수물자 조달, 민간인 지원 문제 등 해외 파병부대 통합사령부로서 다원화된 임무와 기능을 수행했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는 1965년 10월 20일, 당시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Saigon·현 호찌민 시)에 141명의 합동군 참모 기능으로 편성해 연합 및 합동작전을 수행했다.

다음해 66년 8월 15일, 원활한 작전 통제를 위해 냐짱에 야전사령부를 창설했다. 즉 제9사단의 증파에 따라 효과적인 작전 통제와 제100군수 사령부에 대한 협조가 필요했다.

제9사단의 배치와 운용에 관해 미군과 견해차가 컸으나 1번 도로를 연해 해안선 지역을 따라 전략적 핵심 지역 배치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야전사령관은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 겸임을 하고 행정 부사령관은 사이공에서, 작전 부사령관은 냐짱 현지에서 참모 요원을 구성해 예하부대 작전 통제를 위한 전방 지휘소 역할을 했다.

당시 냐짱에는 미 1야전군사령부가 있어 월 1회 개최된 한ㆍ미ㆍ남베트남군과의 연합작전회의와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았던 공중 및 해상작전 지원 등은 연합작전 능력을 배양하는 중요한 기회가 됐다. 73년 3월 23일 남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철수할 때까지 파병된 연 병력 32만4864명을 지휘하는 남베트남 주둔 한국군의 최고사령부였다. 기간 중 한국군은 57만7487회의 대ㆍ소규모 작전을 통해 한국군 전술책임지역 7000㎢를 평정하고, 남베트남 난민 120만여 명의 거주를 지원했으며, 태권도 보급과 대민지원 활동을 통해 양국의 선린 우호관계를 증진시켰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작전 지휘 및 통제 경험은 철수 후 73년 7월 1일부로 3군사령부 창설의 원동력이 됐다. 즉 자국의 방위는 자국이 책임진다는 닉슨 독트린의 영향으로 71년 3월 주한 미7사단의 철수에 따른 서부전선지역의 방어상 공백과 한미 1군단의 임무 종결에 대비한 지휘체제의 조정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주월 한국군 사령부를 모체로 한 새로운 군사령부 창설 계획에 의거, 예하의 수도사단 및 9사단을 비롯한 부대들이 존속됐고 초대 사령관에는 이세호 중장이 임명됐다. 이처럼 주월 한국군은 철수 후에도 실전 경험을 갖춘 병력과 휴대해 온 신형 장비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군 현대화 계획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또 미국과의 안보협력 파트너십이 더욱 공고해지고 연합 방위 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계기가 됐다.

▶ 100군수사령부 (十字星 부대)

전투부대가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작전 여건을 보장하는 데 있어 전투근무지원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연평균 34도 내외의 무더운 기상과 울창한 정글로 형성된 험준한 산악, 늪지대 등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고 헌신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십자성 부대의 명칭은 ‘장거리 이격된 전투부대의 작전 지원을 하는 남국의 길잡이인 네 개의 별로 구성된 십자성’이라는 의미다.

3차로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의 파병이 결정되자,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비둘기부대와 추가로 파병되는 전투부대를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군수지원부대의 창설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따라 65년 9월 1일부로 강원도 홍천에서 한국군 창설 이래 최초의 통합 군수부대로 7개 기술병과 19개 부대로 구성된 ‘군수지원 사령부’가 창설돼 수도사단에 배속하고, 초대 사령관으로 이범준 준장을 임명했다.

소정의 훈련을 마친 군수지원사령부 장병 3706명은 수도사단과 함께 65년 11월 3일까지 전 부대가 남베트남의 뀌년(Quy Nhon)에 상륙했다. 이후 9사단을 비롯한 추가부대가 파병됨에 따라 66년 6월 1일부로 100군수사령부로 개편하면서 8000여 명으로 증편하고, 수도사단으로부터 주월 한국군 사령부로 배속을 전환했다.

이와 함께 사령부의 위치를 뀌년에서 냐짱(Nha Trang)으로 이동 후 십자성부대는 8개 기지를 운용하면서, 파병 전 기간을 통해 한국군 부대에 대한 군수지원과 각종 건설공사를 병행해 수행했다.

1지원단은 수도사단, 1지원단 예하 11지원대대는 해병여단, 2지원단은 9사단과 야전사령부를 각각 지원했다. 특히 수십 년간 베트콩이 장악하고 있던 닌호아와 뚜이호아 간의 1번 도로 개통을 위한 군수물자 수송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리고 67년 건군 이후 최초로 UH-1D헬기 및 경비행기로 편성된 11항공 중대를 창설해 각종 작전지원과 보급품 공수 등 효과적인 공지합동작전을 수행했다.

또 십자성 3호작전 등과 같은 전투도 수행했으며, 장병들의 입맛에 맞도록 K-레이션(오늘날 전투식량) 및 전투복과 정글화를 한국에서 조변해 조달함으로써 전투력 발휘를 용이하게 했다. 한편 미군 기지 건설 사업에 한국인과 한국 기업체를 적극 참여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수도사단이 주둔했던 뀌년 항구에서의 한진(韓進) 근로자를 보호했다. 또 현대건설의 깜란만 지역 공사 보호 등을 통해 한국 기업이 오늘날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파병 기간 5차에 걸친 군수지원체제 변경을 거쳐 지역 개념에 의한 지원 체제로 전술 제대가 작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철수 시까지 연인원 6만5000여 명의 장병들은 군수 지원 시스템을 효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체계화해 고도로 발전된 보급 제도와 장비 조작 및 정비 기술을 연마했다. 그리고 철수 시 초과 및 잉여 장비를 효과적으로 후송해 국군의 장비 현대화와 국내 보급품의 조달 체계 개선 등 많은 기여를 했다.

이러한 해외 파병부대의 장거리 군수 지원 경험은 걸프전과 이라크 파병 부대 등에 대한 육ㆍ해ㆍ공군의 입체적 군수 지원의 밑거름이 됐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0>
이전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