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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5 08:5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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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1>
<11>또 다른 전쟁, 평정작전과 민사심리전
[한손엔 건설 Brave 따이한 마음씨 Bravo 한손엔 / 2011.03.15]

한국이 1991년 유엔에 가입한 이후 최초의 평화유지군으로서 파견된 부대가 상록수부대(제189공병대대)였다. 이어 앙골라·아프간·아이티 등에 이르기까지 공병부대는 항상 성공적인 임무수행을 해 왔다.

의료 지원 또한 서부 사하라·이라크 등에서 한민족 특유의 따뜻한 손길을 보여 현지인으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아 왔다. 그리고 태권도를 통해 국군의 강인한 모습을 보여 줌과 동시에 현지인에게 신뢰감을 심어 줌으로써 국위를 선양했다. 이러한 성과는 베트남전쟁에서 치열한 전투와 더불어 효과적인 민사 심리전을 벌인 경험이 바탕이 됐다.

비둘기부대가 주둔했던 정문의 현재 모습

남베트남 군인들을 간호하는 한국군 간호장교

당시 이동외과병원이 사용했던 건물의 현재 모습

주월 사령관기 쟁탈 태권도대회의 경기 모습

▶ 건설 지원단(비둘기부대)

베트남전쟁 당시 남베트남 수도였던 사이공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파병된 연합군의 민사심리전 경쟁터였다. 건설지원단이 주둔했던 디안 지역은 남베트남군 제3군단 관할 지역으로 캄보디아 국경으로부터 빈호아와 디안을 거쳐 사이공 남단에 이르는 호찌민 루트로 연결되는 베트콩의 핵심 루트인 ‘D지역’ 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미군·태국군·오스트레일리아군 등이 10개 성(省)을 대상으로 연합 심리전을 전개했는데 비둘기부대의 민사심리전이 으뜸이었다.

건설지원단은 1965년 파병 당시에는 한국군 군사원조단으로서, 육군 제127공병대대, 제101경비대대, 해병 제1독립 공병중대 등으로 편성해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부대’로 명명하고 파병과 동시에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통합 지휘했다. 이후 전투부대의 파병과 함께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창설되자, 건설지원단으로 개편해 ‘일면 작전, 일면 건설’로 남베트남 전 지역에서 댐과 도로, 병원과 학교 등 건설 지원을 통해 남베트남 정부의 평정 사업 달성에 기여했다. 한국군의 건설사업은 민사작전과 연계해 전투의 승리로 이끌어가는 첩경이었으며, 지역 사회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에게 각종 기술을 습득시켜 자립 능력을 부여하고 생산적인 인력을 개발해 베트남의 경제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1968년 비둘기부대의 영내에 설치된 ‘비둘기 기술학교’는 베트남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발전기 및 엔진 전문교육을 실시했으며, 양재학원은 재봉ㆍ자수교육 과정을 운용했다. 그 외에도 비둘기부대는 농토 개간을 비롯해 수리시설 개선과 함께 농기구 등을 기증해 농산물 증산에 많은 기여를 했다.

▶ 의료 지원단

현재 파병 중인 부대 중 의료지원팀은 동명 및 단비부대 등 5개 부대 46명이다. ‘평화의 하얀 손’(동명부대), ‘레오간의 축복’(단비부대)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파병지역에서 의료지원을 통해 많은 찬사와 감동을 주고 있다. 이러한 성과가 있기까지는 제1이동외과병원의 역할이 뒷받침됐다.

군사원조단의 주력인 제1이동외과병원은 1964년 7월 15일 모체부대인 제7후송병원(서울 성북구 창동)에서 장병 130명으로 창설돼, 소정의 훈련을 마치고 태권도 교관단과 함께 9월 22일 사이공(Saigon)에 도착한 후, 붕타우(Vung Tau)에 있는 남베트남 육군 정양병원에서 첫 임무를 시작했다. 뒤이어 1965년에 제106후송병원, 1966년에 제209이동외과병원과 제102후송병원이 각각 파병돼 현지 국군 부대와 민간인 진료를 담당했다.

참전자의 증언에 의하면, “치열한 전투로 발생한 전상자 응급처리, 수술, 병실 간호 및 치료가 끝없이 계속돼, 저 멀리 동이 트는 것을 저녁노을로 착각할 정도였다”라고 했다.

간호장교들의 헌신적인 임무 수행과 따뜻한 손길은 전상자 치료와 더불어 나환자촌 위문, 대민지료 등과 더불어 ‘따이한’ 최고라는 명성을 얻는 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한편 1967년 1월 청룡부대의 위생하사였던 고(故) 지덕칠 중사는 호이안 지역에서 밀림 수색작전 시 적과 교전하다 부상당한 전우를 구하기 위해 8발의 총상을 입은 후 전사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한국군 의료진은 철군 때까지 입원 환자 3만여 명, 외래환자 40만여 명, 대민진료 60만여 명을 진료하는 엄청난 실적을 남겼다.

▶ 태권도 교관단

파병 기간 중 가장 많은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한 인원은 태권도 교관단이다. 베트남에서의 태권도 소개는 1957년 고 딘 디엠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한했을 때 휴전선 일대 제6군단 29사단(1959년 제20사단으로 개편)에서 태권도 연무시범을 참관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때 “백병전에 좋은 무기가 되겠다”라고 찬사를 하며 태권도 시범단을 초청해, 1959년 3월에 각군의 유단자 15명이 남베트남 사관학교 등에서 태권도 순회 시범을 했고 많은 갈채를 받았다. 이어 1962년 12월에 군사원조의 일환으로 남태희 소령 등 4명이 1년 동안 호찌민 투득 체육학교에서 100여 명을 대상으로 태권도 교육을 실시했다.

이동외과병원과 함께 남베트남 파병이 결정되자 백준기 소령 등 10명의 교관단은 1964년 10월 초, 4개 조로 나뉘어 투득의 보병학교, 달랏의 육사, 냐쨩의 해사 등에서 총 1200여 명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했다. 1965년 9월 비둘기부대로 소속을 변경한 후 군 부대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태권도 협회를 발족해, 민간 도장 설립 지원 등을 아끼지 않았다.

전장에서의 평정 작전과 더불어 역점적으로 추진했던 민사심리전의 선봉에는 이처럼 의료지원과 태권도 교육이 있었다. 1966년 9월 주월 한국군 사령부 창설로 태권도 교관단은 70명으로 증편돼 8개 지구대 45개소에서 남베트남군 전 부대 및 경찰, 학교, 민간인을 대상으로 태권도와 유도 교육을 확대했다. 이는 “한국군은 용감하다. 주먹으로 벽돌을 깨고 목을 친다”라는 인식을 적에게 심어 줘 공포심을 갖게 하는 효과도 있었다. 1967년 주월 한국군 태권도 협회를 창설해 남베트남 태권도 협회와 유대 강화를 강화했으며, 유도교관도 추가 파견해 유도 교육도 실시했다.

1968년 2월 베트콩의 구정(뗏)공세 시 남베트남군 제4군단에서 태권도를 지도하던 고(故) 최범섭 중령이 한국인 보호를 위해 이동 중 베트콩의 저격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최 중령에게는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우리 군은 1973년 3월 초 철수 시까지 유단자 2981명을 포함해 최대 30여만 명의 남베트남군 장병과 일부 미군·경찰·학생·민간인을 대상으로 태권도 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남베트남에의 태권도 교관단 파병은 태권도 국제화의 계기가 됐다. 1973년 3월에는 제1회 세계태권도 선수권 대회가 개최됐고, 이어서 세계 태권도 연맹 창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현재 전 세계 9200여만 명이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다.

<오홍국 군사편찬연구소 해외파병사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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