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남베트남 패망의 원인
[정부 국민에 신뢰 얻지 못하고 국민 집단 이기·민족주의 젖어 군대 안보의식 없이 무사안일/2011.03.29]
1975년 4월 30일 11시 30분,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 시)의 대통령궁(현 독립궁)을 향해 북베트남군 전차 한 대가 정문을 부수며 진입했다. 곧이어 게양된 남베트남 국기가 끌어내려지면서 1955년 10월에 건국된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은 20년 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베트남공화국의 퇴장을 ‘조국의 통일’ 또는 ‘민족주의의 승리’라며 반겼던 주민들은 급속히 바뀌는 공산주의체제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남베트남의 붕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베트콩(Vietnam Communist)들도 같은 처지였다. 대부분의 요직을 북에서 내려온 세력이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남베트남을 강타한 폭풍은 현실이 됐다. 그 폭풍의 첫 번째 표적은 150만 명에 이르는 남베트남 정부의 공무원과 군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방으로 강제 이주됐으며 20여만 명의 고위직 인사는 재교육장에 수용됐다.
일반 주민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했던 그들은 사유재산을 내놓아야 했다. 뒤이어 주민을 찾아온 것은 참담한 가난이었다. 전쟁 중에도 쌀 수출국이었으며, 풍요를 구가(謳歌)하던 그들이 세계의 10대 빈국(貧國) 중 하나로 추락하면서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주민들은 살길을 찾아 소형 선박에 목숨을 걸고 ‘보트피플(Boat People)’이 돼 조국을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 수는 1975년 한 해만 해도 23만여 명에 달했다.
이 같은 비극은 1955년 10월에 건국된 베트남공화국이 패망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건국됐으며, 우리나라 전체의 병력과 맞먹는 60만 명의 미군과 연합군이 참전해 지원했던 남베트남이 불과 20년 만에 패망한 원인은 무엇일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지엠 정부 정책 현실과 괴리
남베트남 정부가 출범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은 지대했다. 비교적 참신했던 지도자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대통령이 미국의 지원으로 남베트남을 이끌게 됐기 때문이다. 국민의 기대도 컸다. 그들은 지엠(Diem) 정부가 미국의 막대한 재정지원을 활용해 시장경제를 정착시키면서 반대세력들을 끌어들여 민심을 아우를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지엠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들을 무리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국민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그들을 억압하기 위한 강압적인 정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고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족벌(族閥) 독재정치로 기울었다. 독재정부와 함께 시작된 관리들의 무사안일과 부정부패는 민심을 이반시키는 촉매로 작용했다.
정부가 민심을 잃게 되자 지엠 집권 초기 그를 도왔던 사람들이 반대세력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베트콩 세력을 늘리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결국 지엠 정부는 1963년 11월에 발생한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어 1967년 9월, 응웬반티우(Nguyen Van Thieu)가 대통령에 취임하기까지 4년 동안 무려 열 번에 이르는 쿠데타와 정권 교체가 반복되면서 나라 전체가 심각한 혼란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수시로 바뀌는 정부가 올바른 정책을 펼 수 없었으며 국민들은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집권층은 서로를 의심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급급했다.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부패는 더욱 가속화됐다. 군인도 나라의 안보를 미군 등 연합군에 맡긴 채 사이공에서 이뤄지는 정권의 향방에만 관심을 갖게 됐다.
이와 같이 국가안보와 경제발전, 국민의 복지는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혈안(血眼)이 된 집권층, 무사안일과 부패만을 일삼는 공무원은 나라를 망하게 한 첫 번째 세력이었다.
2.국민 이권위해 집단 시위
정부가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서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잠재돼 있던 민족주의 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며 집권자들은 ‘미국의 주구(走狗)’다”라는 발상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 안주하던 대부분의 주민도 혼란을 이용해 자신들의 기득권 챙기기에 나섰다. 학생·종교인·기업가·노동자 등 누구 할 것 없이 집단적 시위를 하며 자신들의 이권을 관철하려 했다. 그로 인해 정국은 더욱 혼미상태에 빠졌다.
나아가 일반 국민들까지 북베트남과 호찌민을 감상적으로 선망하게 되면서 그들이 지향하는 체제가 공산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들에게 민족주의와 호찌민은 이상(理想)이었으며 이념(ide聯logy)이나 체제(體制)보다 상위 개념이었다. 그들에게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공산주의 세력이 아니라 민족의 통일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신념이 없었으며 또한 지킬 필요조차느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각계각층의 이기주의와 이상만을 추구한 민족주의는 나라를 망하게 만든 두 번째 요인이었다.
3.전투도 없이 넉달만에 최후
1973년, 미군을 비롯한 연합국의 군대가 철수한 후 남베트남은 100만 명이 넘는 지상군과 세계 4위를 자랑하는 공군력 등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따라서 낡은 재래식 장비와 빈약한 보급체계를 갖고 있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군사력은 남베트남과 결코 비교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이에 맞선 남베트남군은 전투다운 전투도 해 보지 못한 채 불과 4개월 만에 최후를 맞았다.
내 나라를 내가 스스로 지킨다는 안보의식 이 없고 무사안일에 빠진 군대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당시 남부 지역에서 활동하던 베트콩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여성도 20만 명이나 됐다. 북베트남의 경우도 100만 명 이상의 여성이 참전했다.
반면 남부의 젊은이들은 풍요로운 물질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생활 수준이 높을수록 어려운 일에 종사하지 않으려 했다. 따라서 많은 고위층 자녀들은 유학을 이유로 병역을 연기 또는 면제받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경제력만 뒷받침된다면 전투 지역에 가지 않는 방법은 많았다. 일정액의 뇌물로 장기휴가를 얻어 사이공에서 빈둥거리는 군인이 부지기수였다. 이들을 ‘유령군인’이라고 불렀다. 또 장군 등 고위직위자의 사병(私兵)으로 그들의 기업체에서 직원 또는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일명 ‘꽃군인’도 있었다.
이 같은 유령군인과 꽃군인을 모두 합할 경우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58만여 명이었던 정규군의 20%에 육박하는 수효다. 결국 정권의 향배에만 관심을 갖던 정치군인과 함께 무사안일에 빠진 군부를 망국의 세 번째 세력으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국민에게 신뢰받지 못한 정부, 국민의 집단이기주의, 무사안일에 빠진 군대 등 3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패망은 당연한 결과였던 셈이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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