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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08: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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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7>
<17>걸프전쟁과 한국군 파병
[실전훈련 경험 축적 세계 화약고서 `일석이조' 美와 유대 더욱 강화 / 2011.04.26]

1990년 8월 2일 새벽 2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해 오전 7시쯤 쿠웨이트시티의 정부청사와 왕궁을 점령했다. 알 사바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했다. 쿠웨이트는 불과 5시간 만에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작은 영토라 하더라도 주권을 가진 국가 간의 전쟁이 불과 5시간 만에 끝나 버린 것은 충격이었다. 이라크는 8월 28일, 쿠웨이트 임시정부와 합의에 따라 쿠웨이트를 19번째 주로 편입했다고 발표했다.

김해비행장에 제막된 걸프전 참전 기념비
아랍에미리트 기지에서 거행된 한국공군수송단 도착 환영행사
아랍에미리트 기지에서의 비행 전 임무 브리핑

▲ 이라크의 침공 배경

이라크가 같은 이슬람국가인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물론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이슬람국가를 침공한 적은 있었다. 그는 아랍국가의 맹주를 자처하며 1980년 9월, 동쪽의 이란을 침공해 8년간의 전쟁을 치렀다. 두 나라는 민족과 종교에서 이질적인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란은 이슬람국가이긴 했지만 수니파인 후세인과 달리 시아파를 믿으며, 인구의 97%가 페르시아족 등 비아랍계였다.

후세인은 1988년 유엔의 중재하에 이란과 정전협정을 체결했지만 전쟁의 후유증이 엄청났다. 800억 달러의 부채와 엄청난 국방비, 42만여 명의 인원 손실은 후세인 정권의 존립을 위협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는 경상북도 정도의 크기에 240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작은 나라 쿠웨이트를 표적으로 삼았다. 그는 쿠웨이트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협정을 무시하고 더 많은 석유를 채굴해 유가하락으로 130억 달러의 손해를 입혔으며, 국경 부근의 유전에서 24억 달러어치의 석유를 도굴해 갔다고 강변했다.

두 나라의 갈등은 해묵은 것이었다. 이라크는 1961년 쿠웨이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국경선 문제를 제기했다. 쿠웨이트보다 24배나 되는 국토 면적을 가진 자신들은 걸프만으로 연결되는 해안선이 고작 24㎞인 반면 쿠웨이트는 200㎞나 된다는 것이었다. 그 후 이라크는 수시로 쿠웨이트의 국경을 침범하며 분쟁을 일으켰다. 전쟁 직전인 7월에도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그러나 쿠웨이트의 국민과 정부는 계속되는 이라크의 도발에 둔감해져 있었다. ‘양치기 소년의 늑대 소동’과 같은 격이었다.

▲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응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기습점령하자 유엔은 이라크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즉각 발표했다. 이어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군에 기지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하며 이라크 응징에 적극 나섰다. 미국·영국의 파병 결정과 함께 이집트·터키·모로코 등 이슬람국가의 파병 결정이 줄을 이었다.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점령한 후 ‘아랍민족주의’와 ‘석유자원’을 무기화해 대항할 경우 유엔과 미국은 쉽사리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목표는 쿠웨이트, 목적은 이스라엘’이라고 천명하며 자신의 군사행동을 ‘반이스라엘, 반미 대결’로 몰아가려 했다. 그러나 아랍국가들이 이라크 응징에 참가하면서 후세인의 구도는 무너지고 말았다.

후세인은 지지세력 구축을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9월 10일에는 앙숙이었던 이란과 재수교(修交)에 합의했다. 미국의 걸프만 진출을 견제한다는 공동의 이해 앞에 과거의 원한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국제관계에서 이상보다 현실적인 국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 한국군 의료지원단 및 공군수송단 파병

이라크의 침공 직후부터 미국은 파병외교에 나섰다. 9월 7일에는 재무부장관 등 고위관리를 서울에 파견해 한국의 동참을 요청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88올림픽 이후 적극적인 북방외교를 추진하면서 동구권 국가 등과 수교한 후 소련과 수교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또 유엔 가입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 등 국제사회의 협력이 특히 중요한 시기였다.

한국의 국격을 고려할 때 이라크의 침략 응징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베트남 전쟁과 같이 전투부대를 파병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큰 것으로 판단됐다. 원유 수입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걸프만 국가들과 관계 악화는 국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병력 파병 없이 군수물자를 지원하거나 비전투부대를 파병하는 방안을 미국과 협의했다. 그 결과 정부는 145명 규모의 의료지원단 파병을 결정하고 난민구호기금으로 2억2000만 달러를 책정했다. 국회는 다음해인 1991년 1월 21일 파병동의안을 가결했다.

특수전사령부에서 훈련을 마친 의료지원단은 1월 23일 항공기편으로 출국해 다음날 사우디에 전개했으며, 30일부터 현지에서 진료 임무를 수행했다.

그 시기에 미국은 공군수송단의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2월 7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CH-130H 수송기 5대, 병력 160명으로 제56공수비행단을 창설했다. 이어 2월 19일과 22일 출국한 공군수송단은 아랍에미리트연합의 미군기지에 전개해 그들과 함께 다국적군을 지원했다.

드디어 1월 17일 3시, 다국적군 항공기 2500여 대가 바그다드 주변 군사시설을 집중 폭격하면서 이라크 응징작전의 막이 올랐다. 언론에 의해 ‘별들의 전쟁’이라고 보도됐던 것처럼 ‘토마호크’ 미사일 등 정밀유도무기들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이라크군은 전쟁 초기에 괴멸되고 말았다.

▲ 걸프전의 종전과 한국군의 철수

다국적 지상군은 2월 14일 공격을 시작했으나 이라크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지상군이 바그다드를 향해 진격을 계속하자 2월 25일 후세인은 항복을 선언하고 유엔의 중재를 요청했다. 이어 파월 미 합참의장은 부시 대통령에게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다”고 보고했다. 부시 대통령은 2월 28일 오전 8시부로 종전을 발표했다.

종전이 선언되자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군의 철수도 제기됐다. 그러나 파병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철수를 서둘러야 할 이유는 없었다. 따라서 한국군 의료지원단과 공군수송단은 현지에서 후속지원임무를 계속 수행하다가 1991년 4월 7일 임무를 종료하고 4월 10일 서울공항으로 귀국했다.

한국군의 걸프전 파병은 1960년대 베트남 파병에 이어 건군 후 두 번째 파병이었다. 파병을 통해 한국군은 세계의 화약고라 불리는 중동지역에서 병력 운용의 경험을 축적하고, 해외정보 능력을 배양하는 등 실전적 훈련의 기회가 됐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과 유대 및 안보동맹을 강화하고 최신 무기체계 획득과 운영을 위한 경험을 축적한 것이다.

선진 우방국과 대등한 군사외교를 펼칠 수 있었던 것도 큰 소득이었다. 당시 한국은 유엔회원국이 아니었음에도 유엔과 보조를 함께하면서 아랍권 국가들과 함께 다국적군을 구성해 아랍국가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서 국익을 창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귀중한 기회였다. 아울러 그해 9월 한국이 유엔의 161번째 회원국이 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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