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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7 09: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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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19>
<19>서부사하라 국군의료지원단 파병
[열사의 사막 뚫고 12년 임무 `퍼펙트' 국경·인종도 넘다 / 2011.05.17]

아프리카 북부지역을 덮고 있는 ‘사하라(Sahara) 사막’은 한반도 40배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그 서쪽 대서양 연안지역이 ‘서부사하라’로 북쪽은 모로코, 동쪽은 알제리, 남쪽은 모리타니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한반도의 1.3배인 26만㎢에 달하지만 인구는 40만여 명에 불과한 곳으로 모로코의 통치하에 있다. 서부사하라는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국군의료지원단이 12년 동안이나 파병됐던 곳으로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국군의료지원단 군의관과 간호장교가 헬기를 이용해 유엔 감시초소로 이동하고 있는 사진
환자를 항공기로 이송 중에 응급조치를 하고 있는 군의관과 간호장교 사진

▲서부사하라 사태와 유엔 선거감시단 파병

1884년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 오던 서부사하라가 국제사회에 알려진 것은 1950년대부터 식민지배에 대한 주민의 저항이 시작되면서부터다. 그 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분쟁이 더욱 격화돼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자 유엔은 “주민투표로 서부사하라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스페인은 1975년 전반기에 주민투표를 시행하기로 하고 인구를 조사한 결과 지역 내에 7만3000여 명의 서부사하라인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자 인접국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서부사하라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서부사하라의 역사적 배경 등 관련된 사실을 조사한 결과 1974년 12월 “서부사하라와 관련된 법적 관계가 서부사하라인은 물론 모로코와 모리타니에도 있지만 서부사하라인의 자결권에 대한 영토적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다소 애매한 판결을 내렸다.

이에 모로코 왕 ‘하산 2세’는 1975년 11월, 모로코인 35만여 명을 서부사하라에 이주시켜 정착촌(定着村)을 건설하게 했다. 그 시기에 스페인은 마드리드에서 모로코와 모리타니가 참가하는 3개국 회담을 통해 “서부사하라를 분할해 북부의 3분의 2는 모로코에, 남부의 3분의 1은 모리타니에 양도한다”는 ‘마드리드 협정’을 체결한 후 1976년 2월 서부사하라에서 철수해 버렸다.

서부사하라인의 무장세력인 ‘폴리사리오(Polisario)’는 스페인의 조치에 격분해 스페인이 철수한 다음날 ‘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을 선포하고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폴리사리오의 공격이 계속되자 모리타니는 1979년 8월, 서부사하라 남부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모로코가 서부사하라 전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 그때부터 폴리사리오와 모로코군이 곳곳에서 충돌하면서 분쟁은 더욱 격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가 되면서 서부사하라인의 자결권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지자 1984년 11월, 아프리카 국가들의 모임인 ‘아프리카단결기구(OAU)’는 폴리사리오가 수립한 ‘사하라아랍민주공화국’을 국가로 인정하고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모로코는 이에 항의해 OAU를 탈퇴했다.

그 후 유엔이 주도하는 수많은 외교적 노력 끝에 양측은 “주민투표로 사하라 문제를 해결한다”는 유엔의 제안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90년 6월, ‘서부사하라선거지원단(MINURSO)’ 창설을 결의했다. 이어 1991년 9월, 양측은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선거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모로코 측이 투표인의 자격 문제를 제기하면서 오늘날까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군의료지원단 파병

국군의료지원단을 서부사하라에 파병하게 된 배경에는 소말리아 상록수부대의 철수와도 관련이 있다. 1994년 2월 유엔의 서부사하라 파병 요청과 우리 정부가 제기한 상록수부대 철수 협상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상록수부대가 파병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중간에 철수하는 부담을 서부사하라에 국군의료지원단을 파병하는 것으로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서부사하라 파병은 국익에 의한 실리적 차원보다 순수한 인도적 차원과 함께 유엔과의 관계를 고려한 파병이었다.

1994년 7월 14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42명으로 편성된 의료지원단 본대가 9월 6일 현지를 향해 출국했다. 그들의 임무는 한국군 도착에 앞서 이미 철수한 스위스 의료지원단의 임무를 인수하는 것으로 서부사하라의 주민투표 및 정전(停戰) 감시를 위해 파병된 유엔 요원에 대한 의료지원 활동이었다. 이를 위해 국군의료지원단은 서부사하라 북부지역 라윤(스페인어 : 엘 아이운)에 중앙진료소를 운용하고, 북부와 남부에 각각 전방진료소를 설치했다.

한편 서부사하라의 주민투표가 계속 연기되면서 690여 명으로 편성됐던 유엔 선거감시 요원이 220여 명으로 축소됨에 따라 유엔은 의료지원단의 감축을 요청해 왔다. 이에 따라 1996년 9월에 파병된 제5진부터는 20명으로 감소 편성하고 6개월 단위로 교대를 계속하면서 임무를 수행해 2006년 5월 15일 철수할 때까지 23진, 연인원 542명이 파병됐다.

▲철수 및 파병 성과

국군의료지원단이 철수하게 된 것은 서부사하라 사태가 조기에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데다가 동일 지역의 임무에 과도하게 장기간 파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정부의 판단에 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의료지원단의 파병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유엔에 통보했다.

정부의 결정에 따라 의료지원단은 수행하던 임무를 뒤이어 파병된 말레이시아 의료지원단에 인계한 후 5월 15일 오전 6시, 라윤을 출발해 모로코 제1의 도시 카사블랑카에서 항공기에 탑승했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해 환승한 의료지원단은 5월 17일 오전 7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도착 당일 오후 2시 육군회관에서 육군참모총장이 주관하는 귀국 환영식 및 해단식을 가졌다.

파병 기간 중 의료지원단은 항공기와 차량을 이용해 열사의 사막을 횡단하면서 유엔감시단이 근무하고 있는 곳곳의 초소를 순회하며 적극적인 진료활동을 펼쳤다. 아울러 군사외교활동의 일환으로 각국의 국가기념일(National Day) 행사에도 적극 참여했다. 특히 한국의 전통복장을 착용하고 우리의 전통문화를 소개하며, 김치 등 고유 음식을 접대하는 ‘한국의 날 행사’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해 한국을 이해시키는 귀중한 기회였다.

해외파병의 역사를 볼 때 동일한 지역에서 동일한 임무를 12년 가까이 수행한 사례는 많지 않다. 그 자체만으로도 국군의료지원단의 세계평화를 위한 기여도를 짐작할 수 있다. 또 국군의료지원단이 철수한 후에도 서부사하라에는 한국군 장교 2명이 정전감시단 요원으로 의료지원단의 얼을 이어 평화유지활동에 계속 참가하고 있다.

한편 국군은 베트남과 걸프전에 파병한 경험이 있었지만, 당시는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개념으로 참가했다. 따라서 대부분의 보급 및 지원 소요를 현지 미군 시설을 이용해 충족할 수밖에 있었다. 반면 유엔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평화유지군의 경우 대부분의 보급 및 지원 소요를 자국의 능력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군의 입장에서는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병부대에 대한 보급과 지원 역시 수월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평화유지군 파병의 역사가 일천했기 때문에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지원체계가 빈약했다. 따라서 적합한 선박 및 항공편을 획득해 서부사하라 지역에 대한 추가 보급과 지원임무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지원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노하우(know how)를 습득하게 된 것도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최용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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