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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2 0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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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타-6·25 결정적 전투들 ⑪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적 병참선 끊어라” 美 공군도 못한 임무 성공적 완수]
공군 정비 요원들이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의 주역이자 6·25전쟁 당시 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F-51을 정비하고 있다. 자료사진

1951년 12월 38도선 인근에서 전선이 고착된 가운데 유엔군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결말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반면 북한과 중공군은 계속적인 증원으로 세력을 확대하려고 시도해 양측 세력이 점차 균형을 이루게 됐다.  

이로써 지상에서는 대규모 작전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진 가운데 연대급 이하의 전초진지 쟁탈전이 반복됐다. 이처럼 지상전에서는 소부대 전투를 제외하고 거의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유엔군 지도부는 교착상태에 빠진 휴전회담의 성과를 진전시키기 위해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공군에게 상황 타개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고 이에 따라 공군은 적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전 병참선에 대한 차단작전을 실시하게 됐다.

이 시기 북한과 중공군은 중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많은 군사물자와 장비를 경의선과 만포선을 통해 평양으로 수송했고, 이를 다시 평양에서 중동부 전선으로 보급하고 있었다. 승호리 철교는 평양 동부 10킬로미터 지점 대동강 지류인 남강에 설치된 철교로서 중국으로부터 평양까지 수송된 보급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보급로의 요충지였다.

미 5공군은 이러한 중요성으로 인해 이미 기존 승호리 철교를 폭파ㆍ차단했으나 북한은 기존 철교 위치에서 하류 방향으로 북쪽 200미터 지점을 우회해 새로운 철교를 가설한 후 주위에 밀집된 대공방어망을 구축했다. 또한 10개의 교각은 침목을 우물 정자(井) 형으로 쌓아 올리고 그 공간에는 모래주머니를 채워 폭격이나 기총에 대해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건설됐다.

미 5공군은 이 철교를 폭파하기 위해 미 전폭기를 약 500소티(sortie) 이상 출격했으나 실패하자 이 임무를 한국 공군에 이양했다. 임무를 부여받은 공군 10전투비행전대장 김신 대령은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 달성자인 김두만 소령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1952년 1월 12일 아침 7시 40분 편대장 김두만 소령의 지휘 아래, 2번기 장성태 대위, 3번기 김금성 대위, 4번기 이기협 대위, 5번기 전봉희 대위가 탑승한 F-51 전투기 5기 편대가 강릉기지를 이륙했다.

F-51 편대는 편대장의 지휘 아래 표적상공에 도착했고 우선 로켓탄과 기총으로 적 대공포진지를 무력화한 후 500파운드 폭탄 10발을 투하했으나 폭탄이 교각 사이의 모래바닥과 물 속에 떨어져 폭파에 실패했다.

같은 날 오후 2시에 이륙한 윤응렬 대위가 지휘하는 3기 편대(2번기 주영복 대위, 3번기 정주량 대위)가 재차 임무를 시도했으나 교각 위의 철로만 손상을 입혔을 뿐 교량 폭파에는 실패했다.

첫날 임무에 실패한 김신 대령은 참모들과 숙의 끝에 8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30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현재의 미군 전술로는 철교 폭파가 불가능한 것임을 인식하고 4000피트 상공에서 강하해 15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조종사에게는 매우 위험과 모험이 따르는 저고도 폭격 방안을 구상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1952년 1월 15일 오전 8시 25분 엄동설한으로 살을 엘 듯한 한파 속에 제1편대장 윤응렬 대위(2번기 정주량 대위, 3번기 장성태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2번기 유치곤 대위, 3번기 박재호 대위)가 이끄는 6대의 F-51 전폭기는 적의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표적 상공에 도착했다. 먼저 제1편대가 적의 심한 대공 포화를 피해가며 편대장기를 선두로 기수를 목표에 맞춰 진입해 로켓탄을 발사하자 철교의 경간 2개에서 검붉은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이어 제2편대가 표적을 향해 진입하자 1편대는 2편대를 엄호하기 위해 잔여 로켓탄과 기총을 적의 대공포 진지를 향해 발사했고 2편대는 적이 대공포화의 위협을 뒤로하고 정확한 조준 하에 폭탄과 로켓탄을 표적에 투하하자 2개의 교각경간이 파괴되며 철편이 허공에 솟아올라 떨어지며 철교의 중앙에 2개의 큰 구멍이 생겼다. 이로써 승호리 철교는 우리 공군이 출격한 지 14소티 만에 파괴시키는 놀라운 성과를 나타냈다.

이날 F-51기 6대는 폭탄 12발, 로켓탄 20발, 50밀리 기총 4700발을 사용해 승호리 철교 폭파 외에도 포진지 6개소, 보급품 집적소 1개소, 벙커 3개소, 건물 1개 동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날의 전공은 2월 21일 미 5공군 각 비행단의 지휘관 회의에서 소개됐고 김신 대령은 이 자리에서 축하 박수 세례를 받았는데, 후일 김신 대령은 이날의 회의를 술회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그날 회의에 참석하니 한 미국 해병대 장교가 “아주 반갑다”며 “우리도 거기 갔지만 끝내 한국 공군이 끊었구먼”하고 축하해 줬다. 후에 알고 보니 유엔 공군이 약 500회 출격해서 끊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엔 공군도 이 철교를 폭파하고자 연일 부대를 바꿔 가며 출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한국 공군에 넘겼는데 이때 미군장교 두 명이 한국 공군의 성패 여부에 대해 돈을 걸고 내기를 했는데, 이날 내게 반갑게 축하인사를 던진 해병대 장교가 내기에서 이긴 사람이었다.

승호리 철교 차단작전의 성공은 한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기필코 성공시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대공포가 작렬하는 상황에서 초저공침투비행을 두려워하지 않은 조종사들의 높은 전투의지에 기인한 것으로 대외에 한국 공군의 높은 전투기량과 감투정신을 과시한 사례로 기록됐다.

[美 공군사령관, 철교 폭파사진 보여주며 축하인사공군 원로들이 말하는 승호리작전]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상황을 기록한 전투 요보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당시 10전투비행전대장이었던 김신(1922~ㆍ예비역 중장) 전 공군참모총장은 2000년 당시 작전에 대한 상세한 증언을 남긴 바 있다. 당시 편대장으로 직접 승호리 철교 차단 작전에 성공한 윤응렬(1927~ㆍ예비역 소장) 대위도 1966년 공사교장 재임 시절 작전 체험담을 증언했었다. 공군본부가 펴낸 ‘6·25전쟁 증언록’에 수록된 김신 장군과 윤응렬 장군의 증언을 살펴 본다.

■ 김신 장군이 말하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10전투비행전대장이었던 김영환 장군이 미 공군대학 지휘참모과정으로 도미유학을 하게 돼 1951년 11월 10일 내가 10전투비행전대장에 임명됐다. 그때 내 휘하에는 오춘목·윤웅렬·옥만호·주영복·김성룡·김두만 같은 베테랑 조종사들이 있었다.

1952년 1월 초 미 5공군으로부터 승호리 철교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조종사들은 철교를 공격할 때 적당히 높은 고도에서 폭탄을 투하했는데 특히 미 조종사들은 높은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일이 많아 승호리 철교에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미 공군들은 각 비행단끼리 승호리 철교를 끊는 데 돈을 걸고 내기를 할 정도여서 결국 끊지 못했다.

나도 한 번 이 철교 부근에 들어가 봤는데, 공중에서 고사포탄이 무수히 터졌다. 적의 고사포가 이 철교를 끊지 못하게 한 주원인이었다. 그래서 미 공군이 결국 우리에게 승호리 철교 폭파임무를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우리에게 맡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공군도 명예가 있으니 미군도 못한 것을 우리가 해 낸다면 얼마나 자랑이냐, 우리 대한민국 공군의 명예를 걸고 최대한의 노력으로 한번 해 보자”고 부하들을 격려했다. 결국 우리 조종사들이 승호리 철교 폭파에 성공했다.

당시 미 5공군사령부가 지금의 서울대학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 같은 건물이 아니고 빨간 벽돌집이었다. 여기서 이따금씩 자기네 부대장 회의를 했는데 한번은 미 6146고문단에서 한국 공군도 참석하라고 해서 가 보니 작전 브리핑을 끝낸 다음 미 5공군사령관이 승호리 철교를 폭파시킨 사진을 걸어놓고 한국 공군이 한 것이라며 내게 축하를 해줬다.

F-51 무스탕은 아무렇지도 않다가 갑자기 엔진고장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때는 주로 대공포가 문제가 됐지만 전쟁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오히려 지상군의 소총 공격이었다. 비행기가 저공으로 내려갈 때 대공포는 별 소용이 없고 제일 무서운 것이 적의 ‘따발총’이다. 적 보병들이 10명이고, 20명이고 땅에 누워서 소총으로 비행기 전방 약 20~30m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하면 F-51의 어딘가에는 총알에 맞게 돼 있다. F-51 조종사들은 당시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출격해 전공을 세운 것이다.

■ 윤응렬 장군이 말하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

출격 전에 김신 장군이 성공한 편대에 대해 상을 준다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작전계획을 세웠는데 꼭 끊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국 교리에 의하면 8000피트 고도에서 공격해 들어가 30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해야 하는데 그러면 폭탄 명중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1500피트에서 폭탄을 투하하자고 했다.

그래서 적의 고사포가 많이 올라오는 가운데 몇 차례 접근해 공격을 했다. 우리는 철교를 명중시키고,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건 카메라(Gun Camera)로 사진을 찍는 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승호리 철교는 상당히 중요한 목표로서 미 공군기를 비롯해 여러 부대가 수백 소티를 출격하고도 끊지 못했다. 그 와중에 미군이 “한국 공군을 한번 시켜보자” “우리 미군도 안 되는데 한국 사람이 될 리가 있느냐”며 내기를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 공군이 승호리 철교를 끊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건 미국 사람이 돈을 땄고, 우리 출격 조종사 6명도 표창을 받았다.

[6·25전쟁과 공군의 활약전투기 열세 딛고 제공권 장악]
6·25전쟁 당시 한국 공군 조종사들의 모습

전쟁에 대한 아무런 대비 없이 6·25전쟁을 맞이한 것은 국군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공군은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전투장비, 즉 전투기 없이 적을 맞이했다는 점에서 너무나도 비극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군은 전황의 긴박함으로 인한 미군의 신속한 참전과 당시 공군요원의 불같은 전투의지로 이러한 요소를 극복하고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 개전 초 수일을 제외한 기간 동안 유엔공군과 함께 6·25전쟁 내내 제공권을 유지하며 초기의 불리한 전세를 극복하면서 전투임무를 수행했다.

한국 육군과 해군이 1948년 8월 15일 한국정부 수립과 함께 정식으로 출범했지만 공군의 창설은 지연됐다. 1945년 8월 독립과 더불어 항공인들은 공군 독립을 목표로 노력을 매진했지만 한국에는 공군이 필요 없다는 인식을 가진 미 군정청의 반대와 한국군 내부의 반대로 공군의 독립은 한국전이 발발하기 약 9개월 전인 1949년 10월 1일이 돼서야 이뤄졌다.

이전 육군 항공사령부로부터 독립한 공군의 규모는 병력 1616명과 항공기 20대(L-4/5 각 10대)였다. 공군 독립 이후 북한 공군력 확대에 자극받아 미국에 수차례에 걸친 공군력 증강 요청이 좌절됐고 국민성금으로 구입한 캐나다산 T-6 10대만을 추가 도입한 상태에서 공군은 1950년 6월 25일 비극적인 전쟁을 맨몸으로 맞게 됐다.

당시 항공기는 L-4 8대, L-5 4대, T-6 항공기 10대를 포함한 총 22대였으며 병력은 장교 242명을 포함 총 1897명으로 당시 전투기 및 폭격기 197대와 지원기 29대 등 총 226대의 항공기와 병력 약 2800여 명을 보유한 북한 공군과는 전투가 불가능한 극심한 전력 불균형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로 인해 공군은 개전 초기에는 연락 및 정찰용 항공기에서 손으로 일반 폭탄을 투하하는 항공전 사상 유례가 없는 작전형태를 보였으나 공군의 전투작전 능력은 이후 4단계를 거쳐 발전하게 된다.

그 첫 번째 단계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1년 3월 31일까지 미군 조종사의 요기(僚機)로서 전투에 참여한 제1작전기다.

두 번째 단계는 1951년 4월 1일부터 9월 18일까지 제주기지로 이동해 F-51에 대한 본격적인 훈련을 받은 이후 백구부대작전과 1차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통해 단독출격 능력을 배양하고 미 공군에 능력을 검증받아 단독출격 능력을 인정받는 제2작전기에 이른다.

1951년 10월 11일부터 1952년 10월 27일까지 제3작전기에는 단독출격을 위해 강릉기지로 10전투비행전대를 전개해 동부 및 중ㆍ서부지역에 대한 항공차단작전에 치중해 실시했으며, 1952년 10월 28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제4작전기에는 한국 공군과 육군 간 공지합동작전에 주력하면서 후방차단작전을 실시했다. 이로써 한국 공군은 MIG-15 요격임무와 같은 제공 임무를 제외한 모든 대지공격 작전이 가능한 면모를 갖추게 된다.

병력 및 장비를 포함하는 전력 측면에서도 1949년 10월 1일 육군으로부터 독립 당시 보유한 전력은 고작 항공기 20대(L-4/5 각 10대)였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한 당시 항공기는 L-4 8대, L-5 4대, T-6 항공기 10대를 포함한 총 22대였으며 전쟁 발발 약 일주일이 지난 시점인 1951년 7월 2일 F-51 10대를 도입, 보유하게 됨으로써 한국 공군 사상 최초로 공중 전투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F-51 전투기 보유량을 확대하게 됐다. 항공기 보유량 추이를 살펴보면 1950년 12월에는 F-51 8대를 포함해 총 19대, 1951년 12월에는 총 44대, 1952년 12월에는 총 75대, 정전이 성립된 1953년 7월에는 총 118대로 증가하게 된다.

병력면에서 살펴 보면 창군 당시에는 장교 143명, 항공병 1376명, 항공사관학교 사관후보생 97명을 포함 총 1616명이었으며, 개전 시 병력은 장교 242명을 포함 총 1897명이었다. 그러나 1953년 7월 정전 시에는 1만1461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조종사 배출은 1950년에 T-6 조종사 33명을 시작으로 1951년에는 F-51 38명, T-6 21명, L형 14명 등 73명, 1952년에는 F-51 48명, T-6 101명, L형 122명 등 271명, 1953년에는 F-51 85명, T-6 151명, L형 112명 등이 배출됐다.

그러나 전쟁기간 중 실제로 F-51 전투기로 출격한 조종사는 1950년에 12명, 1951년에 24명, 1952년에 45명, 1953년에 34명으로 총 115명이었다. 이중 총 39명의 100회 이상 출격 조종사가 배출됐다.

전투부대 확장 측면에서도 전투기와 조종사가 증가됨에 따라 개전 시 L형 항공기와 T-6로 이뤄진 공군비행단에서 F-51 전투기가 도입되자 L형 항공기를 분리해 1950년 7월 6일 정찰비행대를 창설했고 1951년 8월에는 ‘제1전투비행단’을 창설해 한국공군 사상 처음으로 부대 명칭에 ‘전투’라는 군 본연의 임무명칭이 사용됐고, 1953년 2월 15일에는 제1전투비행단 예하 제10전투비행전대를 10전투비행단으로 발전 개편시키고 1전투비행단은 제1훈련비행단으로 개칭해 임무를 전환시켰다.

이러한 부대 개편과 확장을 통해 한국 공군은 기존 전투력이 없는 단순한 항공 조직에서 전투력을 가진 1개 전투비행단과 전투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1개 훈련비행단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싸울 수 있는 공군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공군이 6·25전쟁에서 거둔 성과를 종합하면 우선 F-51 전투기는 총 8495회 출격했으며 작전형태별로는 후방차단작전 5337회(62.9%), 근접항공지원작전 2656회(31.3%), 대지공격 258회(3%), 공비토벌작전 198회(2.3%), 기타 46회(0.5)를 실시했다. 출격을 통해 적군 889명을 사살하고 건물 1770개 동, 보급품집적소 1203개소, 철교 및 교량 124개, 터널 108개, 포진지 521개, 벙커 521개소 등의 표적에 대해 파괴 또는 손상을 입혔다. 또한 차단작전을 통해 도로 93개, 철도 1014개소에 대해 수송차단을 실시했다.

그러나 우리 공군도 손실을 입었는데 F-51 항공기를 포함한 총 117대 항공기와, 조종사 손실도 39명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상황과 여건 하에서 이룩한 눈부신 성과 이면에는 전투기가 전무한 전쟁 초기의 비극적 상황에서도 전투의지를 버리지 않고 전쟁 개시 일주일 만에 미국에서 도입된 F-51을 신이 내린 병기(兵器)로 인식하고 사전 훈련과 적응 여부와는 관계없이 F-51에 올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적진을 공격하다 희생된 다수의 조종사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전투의지는 전쟁기간 내내 공군의 정신이 됐고 공군의 작전능력과 전력 신장에 밑거름이 됐다.

<이근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정리=김병륜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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