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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3 09: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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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타-6·25 결정적 전투들 ⑫ 안악골전투와 유격전 <끝>
[동에 번쩍 서에 번쩍 `6·25 의병' 정규군 버금가는 눈부신 전과]

당시 손으로 직접 쓴 

동키 3부대의 편제표, 6·25전쟁에서 맹활약한 유격대 모습. 사진은 1951년 2월께 동키 11부대 대원들

동키 20부대 부대장 박동호는 “국가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하지만, 실제로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6·25전쟁 당시 반공유격대 대원들이었다.

6·25전쟁 시기 반공유격대 활동은 전쟁 초기부터 자생적인 단체에 의해 시작됐다. 비록 소규모이지만 북한군의 우세한 공세 속에 정규적인 훈련을 받지 않고 장비나 보급면에서 부족한 상황에서, 북한군이 점령한 강원도ㆍ경기도 ·전라도 등지에서 반공청년들은 유격대를 자발적으로 결성했다.

그들은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나 국군과 경찰이 남기고 간 무기로 무장했다. 국군에서도 적의 후방을 교란시키기 위해 ‘유격사령부’ ‘명부대’ ‘결사유격대’ 등을 창설해 작전을 전개했고, 미군은 물론 중앙정보국(CIA)에서도 유격전을 수행했다.

  자생적이거나 국군 혹은 미군의 지원을 받았던 유격대원은 모두 우리 역사상 국난 때마다 등장한 의병의 전통을 이은 ‘6·25 의병’이었고, 외세를 등에 업은 공산주의자에 맞서서 일어선 ‘자유의병’, 혹은 ‘반공유격대’였다. 거창한 애국심보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복수심, 고향 수복, 조국에 자유가 와야 한다는 신념 등이 그들의 활동을 지탱해 주는 커다란 힘이었다.

■ 반공유격대의 의의

전쟁 초기 북한군에 의해 수세에 몰릴 때, 민간 자생유격대와 국군유격대의 활동은 일시적이었으며 ‘게릴라전은 약자의 수단’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 해당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미군 지원 아래 편성된 제8240유격부대는 게릴라전이 체계적으로 이뤄졌으며 약자의 수준도 아니었다. 한때 2만 명이 넘은 대원들은 로켓포와 무반동총으로도 무장했으며 함포와 공중지원을 받음으로써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미 제8240부대는 서해안에서 백령도와 강화도를 기점으로 옹진반도에서부터 대화도까지, 속초와 주문진을 근거지로 동해안에서 활동했다. 주요 유격부대 로는 동키부대 가운데 동키 1부대(신천부대), 동키 2부대(구월부대), 동키 제3, 4부대(백호부대), 동키 10부대(안악부대), 동키 11부대(옹진학도유격부대 ), 동키 15부대(백마부대) 등이 있었고, 울팩부대 소속으로는 2부대(타이거여단)와 3부대, 7부대, 8부대 등이 있었다.

이 외에 공중침투작전을 시도했던 1공수유격연대와 미 중앙정보국(CIA)이 통제한 영도유격부대가 있었다. 영도유격부대의 작전지역이 동해안 북부지역이 었으므로, 1·4후퇴 때 월남한 강원도와 함경도 출신 가운데 북한에서 반공투쟁 경력이 있는 사람들로 모집된 대원들은 1200명에 이르렀다.

미 제8240유격부대의 특징은 첫째, 유격대의 간부들은 이미 소련 군정시기와 북한 정권 아래에서 반소ㆍ반공 활동을 전개한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국군 과 유엔군이 북진해 오자 각지에서 치안대ㆍ자치대 ㆍ결사구국대 등의 무장대를 조직해 후퇴하는 북한군·내무서 등을 공격할 만큼 세력을 확대했다. 중 공군이 개입한 이후에는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에서 가까운 섬으로 탈출해 고향 수복을 위해 미군의 지원을 받아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반공적인 북한주민 의 지원도 유격전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였다.

둘째, 유격대의 간부들은 일본군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거나 청년방위대나 방위군 간부들, 국군 낙오병이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 경험은 전투력의 기반이 될 수 있었다.

셋째, 대원들은 북한 지역에 침투해 현지에서 반공청년들을 규합해 주민과 유기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주로 짧은 기간 내 소규모 침투공작을 주 로 했다.

넷째, 카투사나 노무단의 지원과는 달리, 제8240부대 유격대원은 미군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독자적인 작전을 주도적으로 수행해 많은 전과를 세웠다.

유격대의 성과를 종합하면, 대원들은 주로 수많은 소규모 전투를 수행하면서 철도 파괴나 통신선 절단, 첩보수집 등을 했다. 첩보수집 활동 성과로는 휴 전 직전까지 미군의 대북 첩보 건수 가운데 켈로(KLO) 대원의 보고가 거의 절반을 상회할 만큼 컸다. 예를 들면 1952년 6월 전체 1234건 중 605건을 차지 했고, 1953년 1월에는 전체 1646건 가운데 KLO 첩보대원의 보고는 1012건이었다.

유격대원들은 비록 전과가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이지는 못했으나, 지속적인 유격투쟁과 첩보활동은 미군의 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은 공산군의 동ㆍ 서해안 진출을 저지하는 동시에 기습상륙작전으로 적 전선의 병력을 해안선 일대로 분산시켰고 적 후방을 교란해 그들의 활동범위를 제약했다.

전쟁 시기 유엔 해군 및 공군, 국군 해군이 동서 해안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해도, 유격대의 활동으로 서해 5도를 고수할 수 있었다. 유격대는 방어적인 작전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해안에서 취약점만 보이면 적지로 파고드는 적극적인 공격작전으로 북한의 동서 내륙을 교란했다.

그들의 전과가 일부 과장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감안한다 해도 유격대를 통제하는 미군 장병들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유격대 활동 경험이 거의 없 었을 뿐만 아니라, 잘 훈련되지 않은 유격대원들이 1만 명 이상의 적을 살상하고 군수물자 집적소ㆍ철도ㆍ교량 등을 파괴했으며 피란민과 격추된 유엔군 비행사를 구출했다.

이러한 성과 덕택에 북한군과 중공군 2개 사단 규모 이상의 병력을 배치하도록 했던 것은 커다란 성과로 평가할 만하다. 북한군과 중공군의 병력을 분산 시키는 것만으로도 유격대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 동키 11부대의 안악골전투

유격전은 정규전의 특성과 달라 한두 개의 전투만을 결정적인 전투로 선정해 의미를 부여하기는 쉽지 않다. 유격전의 실제 작전 모습을 살펴본다는 의미 에서 동키 11부대의 안악골전투 사례를 한번 살펴 보자.

황해도 옹진군 흥미면에서 벌어진 안악골전투는 미 극동군사령부 8240부대 가운데 하나였던 옹진학도유격대의 대표적인 전과다. 동키 11부대로 재편된 이 부대는 1951년 2월 옹진에서 피란 나온 학생들로 편성돼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용호도ㆍ순위도ㆍ어화도ㆍ창린도 등을 거점으로 황해도 신천으로부터 해주 를 잇는 서남쪽 지역에서 대북 유격활동을 전개했다.

1952년 6월 23일 부대 본부에서는 귀순병 왕일선에 대한 심문과정에서 흥미면 안악골에 북한군 23여단의 1개 중대 규모가 이동해 해안 일대에 포대 진지 를 구축하고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따라 이종학 부대장은 적들의 주둔으로 유격대의 공작활동이 지장을 받고 있으므로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1대대와 2대대, 부대 본부 직할공작대를 동원하기로 했다. 백령도기지에서 고문관으로 파견된 맥브라이드 중위와 대원 250명이 2척의 발 동선과 13척의 범선을 동원해 안락리(안악골)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부대본부에서는 작전계획의 수립과 동시에 창린도에 주둔한 1대대의 병력을 어화도로 이동시켰고, 2대대는 집결지를 순위도 창암리로 했다. 1952년 6월 24일 1대대는 순위도의 서쪽과 등산곶을 돌아서 괘암리 빗돌마을로 상륙시키고, 2대대 및 직할공작대는 순위도 동쪽 끝 냉정리 사구지 해협을 통해 상륙 지점인 66고지 하단 지점으로 각각 침투해 안락리를 기습공격할 계획으로 목표지역으로 출동했다.

흥미면 안락리는 옹진반도에서 가장 길게 서해로 뻗어 나온 흥미반도의 지점에 위치해 강령으로부터는 28㎞ 떨어져 있으나 순위도 해안으로부터는 4㎞ 정 도 거리에 위치해 기습하기 좋은 조건이었다. 더구나 귀순병으로부터 경비병의 위치, 중대의 방어배치 등의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기습 작전에 크게 유 리했다.

1951년 6월 24일 밤 12시쯤 야음을 이용해 대원들은 상륙지점까지 무사히 침투에 성공했으나 조류가 역류되는 관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시간이 많이 걸 려 날이 훤히 밝아서야 적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장하상 대대장이 지휘하는 2대대의 선발대가 무명고지 정상에 도착한 때는 25일 새벽 5시10분쯤이었 다. 1중대와 2중대가 80고지를 중앙으로 마을을 포위했다.

목영설 대대장이 지휘하는 1대대는 괘암리 빗돌마을로 상륙해 안락리 서남쪽 무명고지를 중심으로 1중대와 2중대를 각각 배치 완료했다. 당시 북한군들은 아침 점호가 끝나고 아침운동을 하거나 세면을 하는 등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는 70∼150m로 소총 유효사거리 내에 있었다.

새벽 5시30분쯤 부대장의 신호로 일제히 집중사격을 한 후, 함성과 함께 대원들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대원들은 막사와 방공호를 수색해 적군을 색출해 냈다.

약 한 시간의 전투로 적 1개 중대 100여 명을 살상했고 다발총 27정, 소련제 소총 132정, 일제 99식 소총 22정, 수류탄 150발 등을 노획해 적을 거의 괴 멸시켰으나, 적 지역에서 주간에 장시간 체류하는 것은 역습을 당할 우려가 높기 때문에 대원들은 포로 13명과 함께 서둘러 철수했다. 이 전투에서 김영 철·현덕천 등 유격대원 8명이 전사했고, 2대대 의무관 등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다.

규모면에서 보면 아군 유격대 2개 대대가 적 1개 중대를 공격해 작전에 성공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미 제8240유격부대는 세력을 과장해 적을 기만하 기 위해 단위 유격대를 연대 단위로 편제했기 때문에 유격대 대대 규모는 실제 100여 명 수준이었다. 이처럼 전쟁 중 동서해안에서 활동했던 크고 작은 유격부대는 적 후방에 침투해 소규모 전투일지라도 적을 꾸준히 괴롭히는 유격전이 애국임을 굳게 믿었다.

<조성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참전 노병이 말하는 일신철교 폭파작전-미군과 합동작전 영도부대, 부상자 한 명 없이 임무완수]

영도부대 해상대 폭파소대장을 지냈던 황보현(83ㆍ경기 성남) 씨가 자신의 전투 경험담을 책으로 출간하기 위해 수기를 남기는 등 6ㆍ25전쟁 당시 유격전 경험자들 중 다수가 여러 경로로 상세한 증언을 남겼다. 황씨의 미출간 육필 원고와 역시 영도부대에서 활약했던 이장열·한수신 씨의 과거 증언을 토대 로 6ㆍ25전쟁 당시 유격전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인 일신철교 폭파작전 내용을 소개한다.

해상대로 확대 개편된 후 첫 작전이 일신철교 폭파였다. 이 작전의 목적은 함북 학성군 학성면 일신동에 있는 철교를 폭파해 북한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차단하려는 데 있었다.

미 공군이 이미 수차례 폭격했지만 지형관계로 실패했기 때문에, 해상대가 이를 맡았다. 1952년 1월 중순께 미군 애치슨 대위로부터 눈 덮인 북한지역의 한 사진을 받아 1952년 1월 22일 오박 대장을 비롯해 해상대원 45명은 미 해군이 제공한 함정에 승선해 영도기지를 떠났다. 대원들은 누비방한복을 입고, 방수용 고무바지와 방수 덧신까지 신어 바닷물에 젖지 않도록 하고 눈 위에서 몸을 은폐하기 위해 백색 가운을 입었다. 밤 11시 대원들은 구축함을 떠나 6척의 고무보트에 분승하고 2척의 예인선이 고무보트를 로프로 연결해 끌기 시작했다.

상륙방법은 공작함-예인선-고무보트-수영척후-상륙-본대 상륙 순이었다. 육지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예인선은 속도를 줄여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낮춰 대기하고 있다가, 애치슨 대위가 지휘하는 보트에서 예인 로프 해제의 발광신호가 발사되자, 해안선 전방 약 1000m 해상에서 6척의 고무보트로 각기 노를 저어 해안으로 접근했다. 척후수색대를 가운데로 하고 좌우 양쪽에 공격, 방어대를 거느리고 폭파대는 이들과 거리를 둔 상태에서 전진을 계속했다.

북한군의 소총 사거리를 감안해 공격목표로부터 약 500m 지점에서 일단 정지했다.이때 한수신 등 정찰수색대가 먼저 전진해 척후조를 보내 상륙해도 좋다 는 신호를 보냈다. 6척의 고무보트가 일제히 전진을 했다. 약 200m 해상에서 일단 정지하고 제1소대인 수색대가 먼저 상륙해 수색이 완료된 다음 2~3소대 가 상륙해 제2소대는 동ㆍ서 양쪽에 있는 터널 위쪽으로 경계망을 펴고, 제3소대는 재빠르게 양 터널 중간에 위치한 철교 폭파 작업에 들어갔다.

한수신 제1소대장은 대원 2명과 함께 서쪽 고지로 올라가다가 30~40m 전방에 위치한 적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을 받았다. 화력으로 보아 적 병력은 4~5명 정도였고, 적의 위치는 산 중턱에 있는 교통호임에 틀림없었다. 즉시 응사했으나 낮은 곳에서는 불리하다는 판단 아래 김치민·홍선수 두 대원이 적의 측 면으로 우회해 수류탄을 호 속에 던졌다.

전투가 벌어지자 폭파소대도 작업을 중단하고 황보현 소대장의 지휘 아래 교전에 가세했다. 이때 멀리 떨어져 있던 동쪽 고지의 제2소대 1조에서는 상황 파악을 위해 본부에 무전연락을 했으나 소통되지 않았다. 영하 20도의 강추위로 바닷물에 젖은 무전기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8발의 수류탄이 연이어 터지고 적의 사격은 멈춰졌다. 호 속의 적병 8명이 폭사하고 2명은 도망갔다. 황보현 소대장이 지휘하는 폭파조는 민첩한 동작으로 철교에 C₃폭약을 쌓고 철도의 이음새마다 폭약장치를 한 후 해안으로 철수했다.

뒤이어 제1소대와 제2소대의 2조, 3조도 철수했으나 다만 동쪽을 경계하고 있던 제2소대 1조만은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고 방어임무를 계속하고 있었다. 1 조장은 교전이 끝난 후 약 1시간 가까이 경과된 것으로 보아 이미 폭파장치가 끝난 것으로 판단하고 또 무전기 교신이 되지 않아 철수명령이 하달되지 못 했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대원들을 인솔해 해안으로 철수했다.

해상대의 첫 작전은 한 명의 부상자나 낙오자도 없이 전원 무사히 모함으로 돌아왔다. 망원경으로 침투지점을 바라봤더니 철교가 폭파되고 그곳을 통과하 던 기관차까지 파괴됐다.

[잊혀진 전사들 `반공유격대'-투철한 반공정신 중무장 항복 대신 자결 택하기도]

전쟁 때 유격부대의 군

가 악보

6·25 전쟁사에서 정규작전이 중시되고, 한편으로 유격전이라고 하면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기억해 ‘공산주의자의 전유물’인 것처럼 먼저 떠올리는 실 정이다. 더욱이 전쟁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일부 유격대원이 후방에서 말썽을 일으킨 점이 부각돼 유격대의 구체적인 활동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경우도 많 았다.

최근 중국 사료를 보다가, 연변 일대에서 발간됐던 1953년 3월 31일자 ‘동북조선인민보’에서 1953년 2월 미국 극동사령부 8240부대가 함경남도 신포· 광천·이원 등지에 인민군으로 가장시켜 항공기로 투하한 46명의 ‘무장특무’를 일망타진했다는 기사를 찾았다. 그들이 말한 ‘무장특무’는 무장유격대 혹은 첩보대원으로 북한의 중요한 공장·철도·교량·군수창고 등을 파괴하려 했으나 북한의 자위대ㆍ보안대ㆍ인민군 등에 의해 모두 체포됐다고 주장했 다. 미군 기록에도 1953년 2월 중 공중으로 북한의 후방지역에 투하된 인원은 114명으로 파인애플대 20명ㆍ리바이벌대 9명ㆍ턴코트대 6명ㆍ블루보이대 7 명 등 첩보대와 유격대 48명 등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쉽게도 미군 기록에는 개별 인명이 기록돼 있지 않아서 투하된 대원들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더욱이 북한군에 체포된 유격대원들은 포로로 휴전 후 송 환되지 못한 채 아직도 그들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전쟁 중 크고 작은 반공유격대 가운데 눈에 띄는 영웅은 없었지만, 그들의 성과만큼이나 대원들의 희생 역시 적지 않았다. 전투과정에서 동키 3부대 최동하 부대장, 동키 7부대 박칠성 부대장 등을 비롯해 3000명이 넘는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1951년 11월 30일 동키 15부대는 중공군의 침공으로 탄도와 대화도를 빼앗길 때 유태영ㆍ정광남ㆍ최광조 등 3개 연대장 모두 전사했거나 자폭했다. 1952 년 2월 초 북한군이 육도를 공격해 왔을 때, 동키 4부대의 대대장 허성룡ㆍ오선국은 생포되기 직전에 죽음을 택했다. 1952년 8월 하순 외순도에 주둔하고 있던 동키 16부대장 양창렬은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대원들과 함께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수적 열세와 탄약이 고갈되자 도망하기보다 자결을 택했다.

생존한 미 제8240부대의 전우들은 특히 미군 소속으로 돼 있었기 때문에 ‘외인부대’로 취급돼 휴전 후 유격대원 대부분이 귀향하거나 현역으로 입대하 면서 그들의 존재는 물론 그들의 경험과 교훈마저 쉽게 잊혀진 것으로 여겼다.  유격대원들은 그들의 전과보다 투쟁정신이 계승되기를 바란다.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전쟁기간 3년 동안 그들의 희생과 넋이 ‘반공의 등댓불’로 인식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다행히 특수전사령부에서 ‘6·25전쟁 때 활약한 유 격부대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점에 커다란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

<정리=김병륜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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