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은 6·25 전쟁 중에 정규군에 의한 전투 이외에도 남한 후방에 있는 게릴라들이 비정규전을 펼치는 등 2개의 전선(戰線)을 형성하고 아군을 괴롭혔다.
북한 공비들은 낙동강 전선까지 왔다가 퇴각하지 못한 패잔병들과 남부 지역 남로당 당원, 여순10·19사건 등에서 살아남아 숨어든 반란군 출신 등이었다.
공비들이 준동하는 곳에선 낮엔 대한민국, 밤엔 '인민공화국'이란 말이 나돌았다. 공비들은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식량 약탈과 지서습격,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 전방으로 이어지는 국군과 유엔군의 보급선마저 위협을 받게 되자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펼쳐지게 됐다.
1951년 중반 이후 전방의 전선이 안정화되자, 군은 동해안과 인제지역의 수도사단과 8사단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이 병력을 기반으로 1군단장 백선엽 소장<사진 왼쪽>(6·25전쟁 당시 1군단장이던 백선엽 장군이 미군 사진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을 사령관으로 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가 창설됐다. 최초 영·호남 지역 공비는 4000여명 정도로 추산됐다. 하지만 토벌작전을 펼친 결과, 북한 공비는 1만명을 훨씬 웃도는 규모였다.
백야사가 1951년 12월 2일 전면 개시한 작전명은 '쥐잡기(Rat Killer)'였다. 이 작전은 4단계로 진행됐다. 1기 작전(1951년 12월 2~14일), 2기 작전(1951년 12월 16일~1952년 1월 4일), 3기 작전(1952년 1월 4~31일), 4기 작전(1952년 2월 4일~3월 14일) 등이었다.
1기 작전에서 공비 사살 1715명, 생포 1710명, 귀순 132명 등의 전과를 올렸다. 소총 509정, 자동화기 86정, 수류탄 676발, 백미 769석, 벼416가마 등도 획득했다. 잔여공비들은 지리산 일대의 유리한 지형과 은거지를 버리고 토벌부대를 피해 분산 잠적했다.
2기 작전은 전주를 주목표로 하여 그 주변 산악으로 공격방향을 변경했다. 이때 사살된 공비는 4000여명에 달했고, 생포된 공비도 4000여명에 달했다.
1·2기 작전으로 공산 게릴라 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많을 땐 100~200명까지 몰려다니던 게릴라들은 이후 2~3명 정도의 소규모 단위로 전락했다. 그들은 일명 '망실(忘失)'공비라고 불렸다.
3기 작전은 호남지구 공비 잔당들이 지리산으로 재잠입하게 되자, 지리산·백운산·덕유산에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공비 잔당을 격멸하는 것이었다.
4기 작전은 제8사단이 1952년 2월 5일 전선으로 복귀하고, 백야사도 2월 6일부로 전선으로 복귀하게 됨에 따라 작전을 수도사단이 전담하게되었다. 수도사단은 백아산ㆍ모후산ㆍ조계산 지구에 대한 소탕작전과 반복수색을 전개했다. 후방지역 게릴라 소탕으로 휴전 후에도 두고두고 화근이 될 뻔했던 불씨를 잘라버릴 수 있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