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신편<안명로 지음 /유재성 옮김/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펴냄>]
17세기 조선의 대표적 병법서적인 연기신편(演機新編)의 번역본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의해 번역ㆍ출간됐다. 원본은 진형을 주로 논의한 상권, 전투 시 참고사항 등을 수록한 중권, 천문 관측법과 점법을 전쟁에 응용하는 내용을 다룬 하권 등 총 3책으로 돼 있지만, 군사편찬연구소의 의뢰로 유재성 선생이 우리 말로 옮긴 번역본은 열람의 편의를 위해 한 권으로 편집했다.
내용 측면에서 연기신편은 오위진법, 기효신서와 병학지남이라는 좁은 영역에서만 논의되던 진법 논의를 조선은 물론이고 풍후의 악기경을 포함한 중국의 전통적인 진형 논의 전반으로 확대하고 통합한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 왕조 군대의 공식적인 병법서적은 1492년에 완성된 오위진법이었다. 오위진법은 적 기병에 대항하는 것에 작전의 주안점을 두고 있고, 오행 개념을 진법에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조선 후기 군대에서 가장 널리 사용한 병법서적은 1600년대 초반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병학지남이다. 병학지남의 뿌리는 명나라 척계광 장군이 지은 기효신서이고, 이 병법은 16세기에 중국 동해안에서 약탈 행각을 벌였던 왜구에 대항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 특징이다.
조선 전기 진법을 대표하는 오위진법과 후기 진법을 대표하는 책인 병학지남은 전투방법과 기본적인 전투대형 자체도 다를 뿐만 아니라 깃발과 소리를 이용한 신호체계도 다르다. 편제 용어도 다르다.
결국 조선후기에 들어와 군인들이 오위진법 대신 주로 병학지남을 보게 된 것은 단순하게 진법서적 한 권이 교체된 것이 아니라 조선군의 전술이 완전히 교체됐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 병법을 처음 도입할 당시만 해도 조선군이 실전에서 연패를 거듭했던 위기 상황이었던 만큼 급진적인 전법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큰 반대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자 ‘명나라 척계광의 기효신서나 병학지남은 만능인가’라는 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효종과 숙종대의 문신이었던 안명로(1620~?)가 1660년 무렵 완성한 연기신편은 바로 그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안명로는 병학지남과 그 뿌리가 되는 기효신서에도 약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 조선 전기의 오위진법도 나름대로 장점이 많은 진법서적이므로, 이를 완전히 폐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판단 아래 안명로는 연기신편에 방진·직진·원진 등 오위진법에 수록된 오행진 계열의 각종 진형과 기효신서와 병학지남으로 대표되는 명나라 척계광 장군류의 진형은 물론이고 풍후의 악기경 등 전국시대 이래 중국의 전통적인 진법서적에 수록된 진형들을 총망라해서 소개했다.
안명로의 오위진법 재평가론은 이후 조정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돼 어느 정도 공감대를 확보한다. 이런 논의 과정을 거쳐 오위진법은 만주족 기병을 상대로 한 전투에는 효과가 있고, 병학지남은 왜군 보병을 상대로 한 전투에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결국 연기신편은 오위진법 체제에서 병학지남 체제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 조상들이 전법의 변화라는 중요한 문제에 어떻게 반응하고 고민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또한 연기신편에 실려 있는 학익진 그림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학익진 진형 그림 중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 학술적 가치가 남다르다.
<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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