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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1 15: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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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3>
<3> 조선 전기 대마도·여진 정벌
[강한 군사력으로 해상-북방 `쥐락펴락' / 2011.01.11]

조선왕조(1392∼1910) 519년은 찬란한 민족문화의 창달과 더불어 많은 전란으로 인해 어려움이 컸었다.

중국 대륙에는 명(明·1368∼1644)이 들어서고, 만주 지역에서는 야인집단(野人集團)이 수시로 조선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일본은 무로마치 막부 통제력이 전국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부국강병과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해 명에 대해서는 실리를 추구하는 `사대외교(事大外交)'와 `조공무역(朝貢貿易)'을 추진하고, 일본과 야인 등 인접 소국과는 `교린(交隣)외교'로 평화 공존을 모색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인 역학 구도는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조선은 왜구와 여진 정벌을 위한 해외 파병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반면, 명ㆍ청 교체기의 파병 요청에 대해서는 명분과 국익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다. 군사력의 해외파병은 국가의 이해 관계는 물론 국운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 국가 중대사이기에 신중한 판단이 요구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은 15세기에 대마도 정벌과 여진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조선시대 개발된 이동식 발사무기 신기전

▲ 대마도 정벌(1419)

대마도 정벌은 그동안 왜구의 빈번한 침략에 대해 소극적인 방어 작전에서 전환해 강력한 군사력으로 적극적 공세 작전을 전개했던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조선은 우수한 군사력과 화포·총통(銃筒) 등 신무기로 무장해 왜구(倭寇)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할 수 있었다.

한반도에 대한 왜구의 침략이 가장 극심했던 기간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이었다. 이에 태조 이성계는 개국 초부터 강온 양면 정책을 추진해 왔는데,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14세기 말에 산발적인 침략이 계속됐다.

따라서 1419년(세종 원년) 6월 19일, 이종무ㆍ유정현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7000여 명과 병선 227척을 이끌고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對馬島) 정벌을 단행했다. 이에 일본이 규슈(九州) 지역의 제후(諸侯)를 총동원해 대마도를 방어하도록 했으나, 원정군은 초토화 작전으로 대마도의 주요 항구를 파괴하고 적선 포획 129척, 가옥 소각 1939호, 왜구 참살 104명, 조선인과 중국인 포로 귀환 152명이라는 큰 성과를 거두고 그해 7월에 회군했다. 이로써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한반도의 해안 지역을 약탈하던 왜구의 폐해는 크게 줄어들었다.

세종의 대마도 정벌은 해외파병의 명분과 국익을 동시에 추구했던 사례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자적 판단에 의해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대규모 군사행동을 통해 왜구의 위협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축적된 군사력의 수준과 역량을 입증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대마도 정벌에 성공한 조선은 북방의 경비 강화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삼포(三浦 : 지금의 부산ㆍ울산ㆍ진해항)를 개항해 일본과의 무역을 활성화시키고, 동북아 해상 안전을 확보함으로써 대명 관계에도 외교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선상에서 장기간 해상 작전에 대비한 태풍 등 기상 정보를 수집할 필요성이 요구됐고, 조선군의 전술훈련도 지상전 위주의 진법훈련체계에서 진일보해 상륙전에 대비하는 수륙합동작전체계로 확대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계기도 됐다.

대마도 정벌 상황도

▲ 여진 정벌(1467, 1479)

대마도 정벌 이후 만주 지역의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명나라의 파병 요청이 이어졌다. 이에 앞서 신숙주ㆍ최윤덕과 김종서 등이 주축이 돼 북벌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결과, 서북 4군과 동북 6진을 개척하기도 했다. 15세기 명나라의 파병 요청은 총 세 차례가 있었다. 첫 번째 요청은 1449년(세종 31) 8월 1일 몽골의 야선(也先)이 이끄는 군대가 장성을 돌파해 요하 서쪽의 광녕과 북경 근처의 자형관 일대에 진출할 때였다. 이때 명은 조선에 10만 병력을 요청했는데 조선은 자위를 위한 국방 강화 조치만 취하고 파병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18년 뒤인 1467년(세조 13)에 명은 만주 지역의 건주여진 세력이 성장해 요동을 침공하자 조선군의 지원을 요청해 왔다. “명군이 건주여진을 정면에서 공격할 것이니 조선군은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라”는 것이었다. 세조는 명의 요청에 즉각 파병을 결정하고 강순ㆍ어유소·남이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병력을 출정시켰다. 이는 명의 파병 요청 이전에 조선은 이미 독자적으로 건주여진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건주여진은 요동뿐만 아니라 조선의 변경도 자주 침범하고 있었다. 조선군은 9월 26일 만포에서 압록강을 건너 북진해 9월 하순부터 10월 초순까지 오늘날 집안 일대에서 작전을 실시했다. 명군 5만여 명과 연합작전으로 건주여진의 본거지를 점령하고 많은 전과를 거뒀다. 이러한 성공은 조선 초부터 계속돼 온 정벌전의 소산이자, 쉼 없이 추구해 온 군사력 강화 정책의 성과물이었다. 조선은 1차 여진 정벌을 통해 명과의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변방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이는 명에 대한 사대정책을 중시하기보다 조선 스스로의 필요성과 국익에 주안을 두고 내린 결정으로 평가된다.

여진 정벌 상황도

명은 1479년(성종 10)에 다시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1차 정벌과 같이 건주여진을 다시 공격하고자 하니 조선군은 퇴로를 차단하고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성종은 세조 때의 신속한 파병 결정과는 달리 ‘여진족이 대비태세를 갖추고 있고, 여진과의 관계 악화가 조선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명분과 국익에 대한 논란 끝에 소극적으로 파병했다. 즉, 어유소가 이끄는 1만여 군사를 투입했으나 건주여진에 대해 섣불리 공격하지 말 것과 명군이 토벌하고 지나간 다음에 포로를 획득해 북경에 보내도록 했다. 그런데 11월에 압록강에 도착한 어유소는 강의 얼음이 얇아서 기병대가 건널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의 재량으로 군대를 해산해 버렸다. 이후 12월에 윤필상을 사령관으로 다시 출병한 조선군 3000여 명은 환인과 통화를 거쳐 소규모 작전을 수행한 후 복귀했다. 2차 파병은 명과의 사대 명분론보다 당시 활 제조에 필요한 궁각을 명으로부터 계속 수입하기 위한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다소 소극적으로 파병함으로써 외교관계에 마찰이 없도록 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조 15세기의 세종ㆍ세조ㆍ성종대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한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파병과 명의 파병 요청에 대해 상황에 따라 아예 파병을 거절하거나, 적극적 혹은 소극적 파병을 실시했다. 이는 곧 사대와 교린을 새로운 국가 정책으로 내걸고 출범한 조선왕조가 명분과 국익을 고려해 명과 대등한 관계에서 파병을 단행했던 역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오홍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해외파병사 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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