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732
일 자
2011.01.19 13:20:39
조회수
3354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4>
<4>조선 중기 후금 정벌과 나선 정벌
[국제정세 파악 명분-국익 얻는 혜안 필수/2011.01.18]

후금 정벌 상황도
나선 정벌 상황도
심양 북릉 청태조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의 황궁

세계사에서 17∼18세기는 그야말로 격랑(激浪)의 시대였다. 유럽은 시민 혁명을 통해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바야흐로 근대사회로 진입하고 있었다. 조선은 명ㆍ청의 교체기에 불과 30년 사이에 네 번의 전란을 겪고 명과 청의 요청에 의해 후금·나선정벌에 참전했다.
조선 전기의 대마도 정벌 및 여진 정벌이 파병 명분과 국익을 동시에 추구했던 것에 비해 17세기 명·청의 요청에 의한 파병은 성격이 조금 달랐다. 즉 조ㆍ일 전쟁(1592∼1598) 시 명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보답해야 한다는 명분이 국익보다 강하게 등장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명(明, 1368∼1644)의 국력이 조ㆍ일 전쟁 참전 이후로 급격해 약화되고, 이를 틈타 만주 지역의 건주여진이 국가 형태를 갖추고 후금을 세웠다. 급기야 명은 광해군(1608∼1623) 때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파병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또한 17세기 중반 러시아가 동진 정책으로 북만주로 남하하게 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청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은 조ㆍ청 전쟁(1627, 1636)으로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게 됐으므로 파병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 후금 정벌(1619)

명 중심의 동북아 국제질서는 1580년대에 이르러 누르하치(1559∼1626)가 건주여진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592년 조ㆍ일 전쟁이 발발하자 누르하치는 군대를 파견해 조선을 돕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으나, 조선은 명에 대한 신뢰와 여진에 대한 불신 때문에 거절했다.
그러나 서서히 세력을 확장한 누르하치는 1616년에 후금 건국을 공식 선포함으로써, 명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날 준비가 완료됐음을 대내외에 알렸다. 반면 조선과 명의 관계는 조ㆍ일 전쟁을 통해 더욱 심화돼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618년 명으로부터 “후금 정벌을 위해 조선군도 파병하도록 준비하라”는 요청을 받자, 파병여부를 놓고 광해군과 비변사가 극명한 시각차를 보였다. 즉 광해군은 중국 대륙의 세력의 중심이 명에서 후금으로 변하고 있다고 보고 파병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조ㆍ일 전쟁의 후유증으로 약화된 군사력과 재정적인 어려움 등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하면서 농민들로 구성된 약졸들을 정벌 작전에 투입하면 도움이 안 될뿐더러, 조선군의 파병으로 오히려 국경 방어가 허술해진다는 문제점을 제기했다. 또한 명의 군사력으로 후금의 기병을 막는 방법은 방어가 최선책이며,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지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반면 비변사를 중심으로 한 절대 다수의 신료들은 명의 요청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는 이유로 즉각 파병을 주장했다. 즉 파병에 따르는 제반 문제들보다 명과의 의리가 훨씬 중요하며, 파병을 거절할 경우 조선이 다시 위기에 처한다면 명에 원조를 요청할 수 있는 명분을 잃게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파병 결정이 이뤄지고 1619년 1월,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 1만1000여 명은 압록강을 도하해 명군 유정이 지휘하는 남로군(南路軍) 1만여 명과 함께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 조선군은 무순 인근 ‘살이호산(薩爾滸山) 전투’ 에 이어, 3월 ‘심하(深河) 전투’에서 후금의 매복과 거센 황사로 인해 패배했고, 이때 강홍립은 후금군에 투항했다. 조ㆍ명 연합군의 후금 정벌 실패는 보병 중심의 명군 주력이 강력한 기병으로 편성된 후금군을 제압할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수립하지 못한 채 후금 기병이 자유롭게 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익숙한 적지로 공격해 간 것이 원인이었다. 이 전투가 분수령으로 후금은 청으로 개칭(1636), 중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했다. 그리고 조선은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1637)을 통해 치욕스러운 통한의 역사를 겪기도 했다. 이는 파병의 명분과 국익에 대한 신중한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 나선 정벌(1654, 1658)

나선정벌은 청이 조선군을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黑龍江) 유역으로 두 차례 파병해, 러시아의 북만주 진출을 저지한 것을 말한다. 당시 러시아는 17세기 중엽 우랄 산맥을 넘어 모피를 확보하고 아시아와의 무역 독점을 위해 북만주 일대를 압박했다. 청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1652년 하바로프스크 일대 전투에서 작전 미숙과 화력의 열세로 패배한 후, 재차 출정을 준비하면서 ‘화력을 보강하기 위해 조선에 조총수(鳥銃手) 파병’을 요구했다.
청의 제1차 파병 요청은 1654년(효종 2) 2월에 있었는데, 조총수 100명을 북만주의 영고탑으로 보낼 것을 요청했다. 당시 효종은 ‘북벌(北伐)’을 준비하기 위해 군비를 확충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각 파병을 결정했다. 원정군은 조총수 100명을 포함한 152명으로 편성해 3월 26일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너 영고탑으로 북진했다. 조선군 152명과 청군 1000여 명으로 구성된 조ㆍ청군의 연합 작전은 4월 28일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러시아군 탐사대 400여 명을 상대로 전개됐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승리한 후 8월 3일 개선했다.
제2차 파병은 1658년(효종 9) 다시 이뤄졌다. 1차 파병보다 많은 조총수 200명을 포함한 265명은 청군 500여 명과 함께, 6월 10일 1차 교전 지역보다 하류지역에서 러시아군 250여 명과 접전을 벌였다. 조ㆍ청군의 연합작전은 조선 조총수의 활약으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고 끝이 났다.
나선 정벌의 의의는 비록 소수의 조총수 위주로 파병했으나, 청군에 비해 월등한 전투 기량을 발휘하고 새로운 전투 경험을 축적하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두만강 근처로 남진하던 러시아 세력을 물리침으로써 조선의 동북 지역이 안정됐다. 또한 정묘ㆍ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청에 항복했던 통한(痛恨)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게 된 점도 간과할 수 없다.

▲ 역사 속 파병으로 본 교훈

지금까지 통일신라시대의 당나라 파병으로부터 조선 중기 나선 정벌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 파병 사례에 대해 명분과 국익 측면에서 살펴봤다. 제한된 지면에서 장구한 역사 속 파병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역사 속 파병 사례를 보면서 우리 역사는 외침에 대해 방어에만 급급했던 것이 아니라, 대륙과 해양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적극적인 군사력 운용을 통해 명분과 국익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나친 명분에 집착해 국제 질서의 변화에 즉응하지 못함으로써 전란을 초래했던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고통의 역사가 긍정으로 승화돼 오늘날 대한민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교훈이 된 것이다.

<오홍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해외파병사 연구관>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5>
이전글 [국방일보]기획-한국군 세계를 가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