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마당-언론보도
글번호
i_47000000000706
일 자
2010.06.10 08:54:46
조회수
3539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타-6·25 결정적 전투들 ④ 기계-안강전투
[`8월 공세' 맞서 낙동강 최후방어선 사수 `대반격' 물꼬]

기계-안강전투는 1950년 8월 9일부터 9월 22일까지 기계와 안강, 포항과 경주 북부 일원에서 국군 1군단 예하 수도사단이 북한군 유격부대인 766부대로 증강된 12사단의 남진을 저지한 방어전투다. 1950년 7월 말까지 지연작전을 수행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8월 1일을 기해 낙동강에서 최초로 좌우가 연결된 방어선을 편성했다. 이때 중동부전선을 담당하던 국군 1군단은 북한군 주력이 안동-의성-영천 접근로에 투입될 것으로 판단하고, 예하 8사단과 수도사단을 의성과 길안 일대에 각각 배치했다.

이 무렵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신속한 추격작전으로 이를 돌파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8월 5일을 전후해 낙동강 일대의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일명 ‘북한군의 8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 인해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국군과 유엔군의 방어선 곳곳에서 돌파구가 형성되는 위기가 발생했다. 특히 길안 일대의 수도사단 방어진지가 급속하게 와해되면서 청송~기계 축선이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됐다. 북한군 12사단은 이 공백지대를 통해 저항 없이 남하해 8월 9일 기계를 점령했다.

북한군의 기계 점령은 중동부전선에 최고의 위기를 조성했다. 북한군이 기계 바로 남쪽의 안강-경주로 침투할 경우 국군의 방어선은 동서로 양분돼 대구와 포항이 위태롭게 되고, 나아가 부산 방어를 위한 차후 방어선 편성도 어렵게 되어 수습할 수 없는 국면에 빠질 수도 있었다.

이에 육군본부는 8월 9일 대구에서 신편 중이던 25연대를 안강 지역에 급파하고 뒤이어 기계·포항지구의 방어임무를 위해 포항지구전투사령부를 급편했다. 이때부터 기계-안강 일대에서는 국군이 공세로 전환하기 전인 9월 22일까지 40여 일간에 걸쳐 피아간에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게 됐다.

■ 기계 남쪽 445고지-145고지 전투

8월 9일 안강에 투입된 25연대는 대구에서 재편성한 지 이틀밖에 안 된 연대로 미처 재편성을 끝내지 못한 대대도 있는 실정이었다. 이로 인해 25연대는 병력의 축차적인 투입이 불가피해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1대대와 3대대만이 작전지역에 투입됐다. 이들 병력은 안강 북쪽 6㎞ 지점의 445고지 능선 일대에 배치됐지만, 전투력의 발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때 북한군은 의성과 구산동 일대에 위치한 수도사단이 자신들의 병참선을 차단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게다가 8월 10일 포항지구전투사령부에 배속된 국군 17연대가 11일 안강지구에 도착해 기계~포항 간 도로를 차단하자 그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이에 북한군 12사단은 기계의 확보를 국군의 포위를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하고 기계 남쪽의 구련봉, 특히 전술적으로 중요한 445고지의 탈취에 주력했다.

8월 12일 북한군 12사단은 445고지에 병력을 집중 투입해 고지를 방어 중인 25연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고지 일대에 배치된 25연대 1대대와 11중대는 이날 오후부터 강력해진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어래산에 배치된 11중대는 치열한 백병전까지 전개하면서 끝내 진지를 고수했지만, 1대대는 계속된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분산됐다.

25연대가 445고지의 확보에 실패하자 기계~포항 간 도로를 차단하고 있던 17연대가 투입돼 25연대의 전투지역을 담당하게 됐다. 8월 13일부터 진행된 17연대의 445고지 탈환전은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17연대는 한때 고지의 8부 능선까지 진출하기도 했지만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많은 병력손실을 입고 고지탈환에 실패하는 경험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17연대는 과감한 공격을 거듭한 끝에 16일 18시쯤 445고지를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기계 탈환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 기계 북쪽 288고지 전투와 기계 탈환

기계 남쪽에서 17연대가 445고지 탈환전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 기계 서북쪽 죽장 방면에서는 18연대가 일명 ‘역포위작전계획’에 따라 기계를 향해 진격 중이었다. 이 작전은 북한군 12사단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면서 남과 북에서 기계지구의 적을 포위 공격하는 것이었다. 8월 15일 기갑연대의 측방엄호를 받으며 정자동 일대에서 공격을 개시한 18연대는 16일 구지동 일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구지동 서남방 1㎞ 지점에 위치한 288고지의 점령은 쉽지 않았다. 18연대는 8월 17일 새벽에 2대대가 7중대의 측방 우회 공격으로 북한군의 진지 일부를 돌파함으로써 288고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병력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대대가 288고지를 점령하고, 이에 앞서 1대대가 288고지 동북쪽 2㎞ 지점의 253고지를 점령하자 북한군 12사단은 지휘체계가 와해돼 소부대 단위로 분산된 채 비학산으로 철수했다. 다음날 18연대는 13시쯤 기계에 돌입해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적을 소탕했다. 이와 동시에 기계 남쪽의 445고지와 190고지를 장악하고 있던 17연대도 18연대의 공격에 맞춰 기계 남쪽에서 협공을 가했다. 이로써 기계 부근의 북한군은 대부분이 격멸되고 일부 병력만이 포위망을 뚫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기계 탈환전에서 수도사단은 북한군 1245명을 사살하고, 무기 및 탄약 다수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뒀다.

■ 곤계봉 전투

비학산 일대에서 766부대를 해체해 병력보충과 부대를 재편성한 북한군은 8월 26일 야간에 대규모 공격을 재개해 다음날 새벽 무렵 기계를 재점령했다. 전황을 보고받은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동부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 8군 부사령관이 지휘하는 잭슨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고 국군 1군단의 작전통제를 담당하게 했다.

이처럼 한미연합작전의 지휘체계가 일원화되고 미군이 증원됐음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격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9월 2일 북한군은 전차를 선두로 기계~안강 도로를 따라 주공을 투입하고, 일부 병력으로 사단 좌측의 18연대를 우회 공격함으로써 아군 방어선의 서측이 위태롭게 됐다.

수도사단장은 사단의 좌측 방어선이 돌파되자, 9월 4일 병력을 무릉산~곤계봉~호명리 선으로 철수시켰다. 수도사단은 경주 방어의 성패가 달린 무릉산과 곤계봉 간 약 5㎞ 정면에 기갑연대, 3연대, 17연대 등 3개 연대를 배치했다. 그리고 곤계봉 남쪽 2㎞ 지점의 무명고지에 미 17연대 3대대가 배치돼 수도사단을 지원했다.

이 무렵 주력을 안강에 집결시킨 북한군 12사단은 포항지역의 5사단과 협조해 경주지역을 점령한 후 국군에 대한 포위망을 동쪽에서 급격히 압축, 단시일 내에 부산으로 향하고자 했다. 북한군 12사단은 경주 점령을 위한 1차 공격 목표로 곤계봉을 설정하고, 병력을 집중 투입해 이곳을 공격했다.

경주 북방 12㎞ 지점의 높이 293m인 곤계봉은 형산 강변의 개활지와 안강 일대의 감제가 가능한 중요 지형이었다. 따라서 수도사단과 북한군 12사단은 남북 간 거리가 2.5㎞, 동서 간 폭이 2㎞인 곤계봉 확보에 전체 작전의 성패를 걸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9월 6일부터 13일까지 전개된 곤계봉 전투는 주로 야간에 백병전으로 전개됐으며, 전투기간 중 15회 이상의 공방전이 펼쳐져 쌍방에 막대한 병력 피해를 안겼다. 7일간 수차례에 걸쳐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공방전 끝에 9월 13일 15시에 국군 17연대 2대대가 곤계봉을 공격, 2시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목표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북한군이 곤계봉에 대한 공격을 중단함으로써 17연대는 최후의 승자가 됐다.

■ 호명리 사수전

북한군의 ‘9월 공세’로 국군 수도사단의 전선 재조정이 있던 9월 4일, 사단의 우측 방어를 담당하던 국군 1연대에도 모서동(호명리 남쪽 2㎞)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1연대는 아침에 철수를 개시해 일단 호명리에 집결했다. 호명리는 주변 일대를 감제할 수 있는 낙산이 북쪽에 위치하고, 형산강이 고지 서쪽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감돌고 있어 방어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었다. 또한 형산강에 가설된 낙산교와 안강~포항, 포항~경주 간의 도로를 제압할 수 있는 전술적 요지였다.

이날 오후 지형상의 중요성을 인식한 1연대장은 만약 호명리를 포기하고 모서동으로 철수할 경우 경주로 직결된 능선 접근로의 관문을 북한군에게 내줘 작전상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으로 판단했다.

모든 여건을 고려한 1연대장은 호명리와 낙산에 전면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1연대는 9월 4일 20시쯤 낙산에 방어진지 구축을 완료했다.

한편, 1연대가 낙산을 확보하고 있을 때, 북한군 12사단은 9월 4일 안강에 집결해 1연대 서측의 곤계봉을 향하고 있었고, 동측에서는 북한군 5사단의 1개 연대가 9월 5일 유금리에서 형산강을 도하한 후 홍계동을 거쳐 운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북한군 진로의 중간에 위치한 1연대의 호명리 방어진지는 소규모의 정찰전만 있었을 뿐 한동안 소강상태가 지속됐다.

9월 6일 김백일 1군단장은 수도사단의 전방지휘소가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경주로 이동했다는 보고를 받고 현 방어선을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1연대장은 모서동 선까지 후퇴하라는 군단장의 명령을 받았으나 현 방어진지의 필요성을 역설해 허락을 받고 호명리 진지를 계속 유지했다.

9월 8일과 9일 양일간 1연대는 방어진지 우측방으로 우회공격 한 북한군 5사단 10연대의 일부 병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고 방어진지를 끝까지 사수했다.

9월 4일 이후 적에게 고립된 상황에서도 1연대가 호명리 일대를 확보함으로써 북한군은 작전상 큰 차질을 빚게 됐으며, 반면에 국군 1군단과 수도사단은 무릉산~곤계봉~형산강 선을 연하는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9월 9일 1연대는 미군의 지원부대가 경주에서 모서동까지 주보급로를 개척함으로써 호명리 사수전을 일단락 지었다.

■ 전투 결과

9월 5일 무릉산~곤계봉~형산강 선에 최후의 방어선을 형성한 동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은 격전 끝에 이 선을 확보함으로써 공세 이전의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9월 12일 곤계봉 탈환을 계기로 급반전된 전황은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연결됐다. 9월 16일 반격을 개시한 수도사단은 다음날 형산강 대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18일 안강을 탈환하고 어래산~445고지~145고지~236고지를 연하는 선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북한군 12사단은 방어에 유리한 어래산~445고지~236고지 선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양측은 9월 22일까지 이 선상의 주요 지형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다. 결국 9월 22일 수도사단은 18연대가 어래산 점령 후 봉계동으로 진출하고, 기갑연대가 기계를 재탈환함으로써 40여 일간 진행된 기계-안강전투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동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기계-안강전투를 빛낸 영웅-`비학산 특공대' 혁혁한 전과 … 전장 분위기 급반전]

기계-안강전투에서는 지휘관 한 사람의 명석한 판단력이 결과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를 새삼 느끼게 하는 사례와 병사로서 전장의 분위기를 일거에 전환시키는 희생정신과 감투정신을 보여 준 사례가 적지 않았다.

그중 호명리 사수전에서 보여준 1연대장 한신 중령의 지휘판단은 우연과 개연성이 많은 전장에서 지휘관 한 사람의 명석한 판단과 결심 그리고 이의 시행이 결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한신 중령은 철수명령에도 불구하고 연대장이 독자적으로 철수 지점을 선정한 뒤 진지를 끝까지 사수하며 북한군 12사단의 공세를 저지함으로써 적이 작전계획 수행에 차질을 빚게 함은 물론 국군이 방어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획득하게 해 국군의 방어선 유지와 차후 반격작전의 여건 조성에 수훈을 세웠다.

한편 병사로서 희생정신과 감투정신을 발휘해 전장의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킨 예로는 8월 24일 ‘비학산특공대’로 자원해 큰 전과를 올린 김용식·홍재근 이등병을 들 수 있다. 17연대 3대대 9중대 3소대 소속의 소총수였던 이들은 8월 중순 비학산으로 철수한 북한군이 야간기습으로 아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자 특공대로 자원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특공대가 조직될 때 제일 먼저 지원해 돌격작전의 첨병이 됐으며, 적의 자동화기 진지 옆까지 포복으로 다가가 북한군 군관을 포함한 15명의 적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김용식ㆍ홍재근 이등병은 각각 안강시가지와 자교리 전투에서 북한군과 백병전을 전개하던 중 전사하였다. 정부는 이들의 희생정신과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해 1951년 7월 26일 군인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과 일계급 특진을 추서했다.

<박동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운주산 연대본부 피습 권총으로 맞대응 격퇴- 이병형 장군이 말하는 운주산 대침투방어전]

기계-안강전투 기간 수도사단은 1950년 8월 기계 북쪽에서 적을 역포위하는 데 성공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으며 이후 적의 경주 공격 기도를 20일이나 지연시키는 등 선전해 낙동강방어전의 대미를 장식했다.

하지만 기계-안강전투 기간 중 북한의 소규모 부대가 후방으로 침투해 아군의 연대ㆍ사단급 지휘소를 기습하는 사건이 두 번이나 일어나 큰 교훈이 된다.

고 이병형(1926~2003ㆍ육군중장 전역) 장군의 증언을 통해 운주산에서 고 임충식(1922~1974ㆍ육군대장 전역) 장군이 이끌던 육군 18연대 지휘부가 적의 기습을 격퇴한 과정을 소개한다.

어느 날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우리 연대 지휘부가 위치한 운주산 정상에서 우리 경계병들이 약 1개 소대 규모의 적을 발견해 갑자기 전투가 개시됐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연대본부 지역에서 사격 소리가 나자 연대 지휘부는 당황했지만 임충식 연대장의 침착한 지휘조치에 힘입어 연대 본부 요원에 의해 성공적으로 적 공격을 격퇴했다.

운주산 정상에서 일어난 이 사격 소리에 전방에 배치됐던 대대들은 놀랐으며 상황 문의 전화가 빗발치듯 했다. 우리는 소규모의 적 침투가 이뤄졌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므로 전방경계에 대해서만 특별히 주의를 환기시켰다.

사실 운주산에 침투한 적에 대해서는 연대장 이하 참모장교들은 권총으로 싸웠고, 연대 본부 경계분대가 전투의 주축이 돼 통신병ㆍ헌병, 심지어는 위생병까지 용전분투해 적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던 것이다.

백골부대 본부로서 이때만큼 큰 자부심을 갖고 적에 대한 우월감을 느껴 본 때가 없었다. 이틀날 아침 적 포로의 진술을 기초로 전반적인 침투경과와 적의 침투경로를 조사했다. 적은 운주산 공격이 어려워지자 인접 아군 17연대를 공격했는데 충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적은 아군 17연대 정면에 공격을 가하면서 우리 연대와의 전투 지경선을 확인한 다음 그 간격에 1개 소대 병력을 침투시켰던 것이다.

이 침투부대는 1시간에 100m를 포복전진하는 훈련을 받았으며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서 우리 연대와 17연대의 전투지경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정상 가까이 근접할 수 있었다.

그러다 운주산 정상이 너무 고요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전진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해 자세를 높이다가 아군에 발각된 것이다.

만약 적이 교육받은 대로 1시간에 100m를 포복전진하는 식으로 은밀침투를 계속했다면 상황은 변했을 것이고 18연대 지휘부에도 심각한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있어났다면 지금 생각해 보면 기계 안강전선이 과연 유지될 수 있었을지 의심된다.

주방어선 후방에서 가장 중요한 지형지물인 운주산 정상을 적에게 내준다면 이는 곧 연대장 이하 연대 중요참모들의 전멸과 연대 지휘 기능의 파괴를 가져왔을 것이다. 이 경우 연대 전투력의 붕괴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정리=김병륜 기자>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첨부파일 첨부파일 (파일 명이 길 경우 브라우저 특성상 파일명이 잘릴 수 있습니다.)

20100610.JPG

수정 삭제
목록으로
다음글 [국방일보]기타-6·25 결정적 전투들 ⑤ 인천상륙작전
이전글 [국방일보]기타-6·25 결정적 전투들 ③ 영천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