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 단독작전 눈부신 전과 `탁월한 전투능력' 세계가 주목]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 사상 가장 치열하게 진지전이 전개됐던 시기인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395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국군 9사단이중공군 38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열흘 동안이나 이를 막아내며 고지를 사수한 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 9사단은 중공군 38군 소속 3개 사단의 연속적인 공격을 받아 이를 물리치는 동안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국군 1포병단의 화력지원과 유엔 공군의 항공근접지원하에 끈질기게 저항하던 중공군 1만여 명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 전투 배경
백마고지 전투가 발생하게 된 배경은 이렇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중반에 접어들어서도 비교적 쉽게 타결될 것으로 예상했던 포로 협상이 그 타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하게 되자, 공산군이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벌인 전투였다. 백마고지 전투가 발생하기 전 쌍방은 모든 전선에 걸쳐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대규모의 전면공세를 실시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는 휴전 회담장에서 서로 유리한 휴전조건을 쟁취하려는 협상을 진행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쌍방은 모두 그 결과를 주시하며 군사력 증강에만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휴전 협상이 결렬되자 공산 측은 휴전협상에서 얻지 못한 것을 전투에서 얻으려는 듯 유엔군이 장악한 전선의 주요 고지들에 대한 공격을 일제히 재개했다. 이때 적은 비교적 전선이 안정된 서부와 동부지역보다는 중부지역의 연천~철원 북방의 역곡천 일대에서 유리한 지형 확보를 위한 일련의 고지쟁탈전을 전개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바로 국군 9사단과 중공군이 395고지 일대를 놓고 혈전을 벌였던 백마고지 전투였다.
그러면 중공군은 왜 백마고지를 노렸을까. 그것은 백마고지가 갖는 전략적 이점 때문이었다. 잘 알다시피 백마고지는 행정구역상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의 야산으로 철원읍 서북방 12㎞ 지점의 효성산(596고지) 남쪽 끝자락에 매달려 있는 해발 395m의 고지였다.
하지만 6·25전쟁 전까지 이 일대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런데 1951년 휴전협상이 시작될 때쯤부터 이 일대에서 군사적 접촉이 계속되면서 관심을 모으게 됐다. 즉, 이 지역은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 중 하나인 철원의 서남쪽 견부(肩部)를 구성하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만약 적이 이곳을 점령하면 철원평야가 적의 감제하에 놓이게 될 뿐만 아니라 중부지역에 배치된 아군의 병참선인 3번 도로를 비롯한 많은 보급로를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질 당시 국군 9사단은 미 9군단에 배속돼 있었다. 사단장은 춘천대첩, 동락리전투, 신녕전투 후 압록강 초산에 1착으로 도착해 청성 6사단의 신화를 낳게 한 김종오 장군이었다. 그는 1952년 5월 3일부로 9사단의 8대 사단장으로 부임해 백마고지 전투를 통해 다시 한번 국군 역사에 영원히 남길 ‘백마 9사단’의 신화를 남긴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백마고지 전투 이전 9사단의 상황은 이러했다. 미 9군단 좌익의 9사단은 이 전투가 벌어지기 1년 전인 1951년 10월 17일부터 철원지역의 주저항선에 투입돼 좌로는 백마고지, 우로는 중강리까지 11㎞의 철원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사단정면의 적은 중공군 38군 예하 114사단의 340연대와 324연대였으며, 중공군 113사단이 좌 인접 미2사단 정면에, 중공군 112사단이 38군 예비로서 수정덕산 부근에 배치돼 있었다. 이들은 왜식장총, 다발총, 기관단총, 중기관총, 무반동총, 박격포 등으로 장비되고 보급ㆍ훈련 등도 양호한 것으로 판단됐다.
사단의 주저항선은 대부분 철원평야를 가로지르는 개활지였으며 다만 좌단의 395고지 부근만 구릉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적이 효성산(619고지)을 비롯한 유리한 고지들을 장악해 사단 방어지역을 감제하고 있었으므로 전반적으로 아군은 방어에 취약했다. 특히 주저항선 5㎞ 전방에 위치한 봉래호는 작전지역의 역곡천을 범람시킬 수 있어 작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사단장 김종오 소장은 9월 22일부로 좌측에 30연대, 우측에 29연대를 배치하고, 28연대를 예비로 확보했다. 또 배속받은 51연대는 대대단위로 운용하면서 주저항선을 방어케 했다. 백마고지 방어를 담당한 30연대는 395고지에 1대대를, 중마산 일대에 2대대, 역곡천 남안에 예비 3대대를 각각 배치했다.
사단은 적이 백마고지를 탈취해 철원평야를 제압하는 동시에 차기대공세를 위한 발판을 구축하며 철원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을 통제함으로써 중부전선에서 전략적 이점을 확보해 아군을 크게 위협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에 대한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이 무렵 전 전선에 걸쳐 적의 공세징후가 있어 정찰과 경계를 강화하던 10월 3일에 중공군 군관 1명이 귀순해, “중공군 114사단이 10월 4일과 6일 사이에 백마고지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에 사단은 백마고지 방어병력을 2개 대대규모로 증강하고, 사단예비로 하여금 즉각 역습할 수 있도록 하고, 정찰활동을 더욱 강화했다.
■ 전투 경과
중공군은 1952년 10월 6일 아침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다. 적은 국군 9사단 정면에 포격한 데 이어 봉래호 둑을 파괴해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어 적 114사단이 저녁 7시 15분 30연대가 방어하고 있던 백마고지 일대를 공격했다. 연대는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했으나 다음날 밤 적이 2개 대대로 백마고지를 공격하자, 30연대는 고지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2시간 후 아군 28연대가 이를 역습으로 탈환했다.
10월 8일 새벽 적은 다시 공격했다. 이날 적은 전날까지의 공격이 여의치 못하자 1개 연대를 추가로 투입했다. 이에 국군 28연대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짙은 안개로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아침 8시 10분 어쩔 수 없이 주봉이 적에게 피탈됐다. 사단은 오후 5시 28연대 3대대를 투입해 밤 11시 5분 다시 주봉을 탈환했다.
그러나 5차에 걸친 공방전에서 28연대와 30연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사단은 적 포로의 진술을 기초로 적의 공격이 당분간 계속되리라 판단하고, 29연대를 백마고지에 투입하기 위해 사단예비로 확보했다. 9일 밤 자정이 지나면서 적의 파상공격으로 고지 주봉과 그 우측 능선 일부를 다시 빼앗겼다. 이에 사단은 날이 밝자 적이 점령한 고지에 1만7700발의 포탄과 항공폭격을 실시한 후 29연대로 하여금 역습하게 해 이를 탈환했다.
적은 10일 새벽 다시 공격함으로써 피아간에는 수류탄 투척과 백병전을 전개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에 국군 29연대 1대대는 일시 9부 능선으로 철수한 후, 2대대의 증원을 받아 다시 정상을 탈환했으나,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12일 아침 30연대가 29연대를 초월 공격해 이를 탈환했으나, 적의 반격을 받고 다시 빼앗겼다. 이에 28연대가 10월 15일까지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벌여 고지를 탈환했다. 뒤이어 29연대가 이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함으로써 적을 완전히 물리쳤다. 이로써 약 10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 중공군 38군은 드디어 전선에서 뒤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국군 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군 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여 일간 24회나 주인이 바뀌는 대혈전을 수행한 끝에 마침내 백마고지를 확보하게 됐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해 그중 1만여 명의 피해를 입은 반면, 9사단은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3416명의 피해만 입었을 뿐이다.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이승만 대통령과 백마고지 전투
백마고지 전투는 6·25전쟁에서 국군의 전투능력과 투지를 유감없이 발휘한 결전방어의 대표적인 전투로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치열했다. 9사단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군은 계속해 철원평야를 아군의 통제하에 둘 수 있었다. 또 중부지역의 작전을 위해 필수적인 주요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중부지역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또한 한국군 지휘관의 전투지휘 능력과 한국군 부대의 전투능력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 중 적시적절한 예비대 투입과 부대교대로 부대원들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목표탈취를 위한 투지를 견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포병 및 항공화력을 지원받았다.
결국 이러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9사단은 철의 삼각지를 지배하기 위한 적의 전략적 기도를 꺾고 끝내 고지를 확보했다. 이 전투로 국군 9사단은 철의 삼각지대의 좌변 일각인 철원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됐으며, 중공군 38군은 그들의 23군과 교대한 후 후방으로 물러났다.
한마디로 말해 백마고지 전투는 우리 국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6·25 전쟁사에서 몇 안 되는 ‘지상전의 꽃’이라고 부를 만한 매우 값어치 있는 전투였다. 이 전투를 통해 우리 국군의 명예는 크게 올라갔고, 이에 따라 국군 장병들의 사기도 크게 고양됐다. 이 전투는 매일 신문지상에 보도돼 이승만 대통령과 유엔군, 그리고 온 국민의 관심거리가 됐다. 따라서 이 전투는 하나의 작전 차원을 넘어서 빼앗느냐 또는 빼앗기느냐 하는 쌍방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명예를 건 싸움으로 변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 전투에 유례없이 두 차례나 방문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은 13일 오후 미 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과 함께 사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귀관들이 막강한 미군 사단들 못지않게 용감하게 승리해 주고, 국위를 선양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용기를 얻어 국정을 보살피고 있다”고 격려했다. 또 이 대통령은 전투가 끝난 직후 부슬비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사단을 다시 방문해, “대단히 수고했다”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때 함께 따라 온 밴플리트 장군도 “9사단이 이렇게 잘 싸워줄 줄은 몰랐다”며 “마이 디비전(My Division)”이라고 했다. 이처럼 대통령의 방문은 9사단의 장병들에게 절대 져서는 안 된다는 결의를 다지게 했고, 그 결과 9사단은 백마고지 전투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 백마고지 3군신-`백마고지 3군신' 난공불락 기관총진지 폭파 후 산화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초인의 힘을 발휘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한 전투영웅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늘날까지 귀감으로 전해지고 있는 백마고지 3군신(軍神)의 활약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0월 12일, 아군은 빼앗긴 백마고지 정상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재개했다. 이 임무는 30연대 1대대에 주어졌다. 그러나 공격 중 1대대는 9부능선에 설치된 적 기관총진지에서 뿜어대는 화력에 피해만 입을 뿐 공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적 기관총진지는 아군 공격정면의 길목에 있는 것으로 포병이나 공군 화력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곳에 설치된 난공불락의 진지였다. 이때 부하들의 많은 희생을 보다 못한 1대대 3중대 1소대장 강봉우 소위는 오귀봉 하사와 안영권 하사 등과 함께 수류탄을 뽑아 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기관총진지를 폭파하고 자신들도 현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로써 진로를 타개한 1중대 장병들은 일제히 돌격을 실시해 이날 오후 1시20분을 기해 백마고지 정상을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이 정상의 탈환을 마지막으로 적은 다시 395 상봉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됐고, 이날 수훈을 세운 세 사람은 ‘백마고지 3군신’으로 추앙돼 청사에 길이 남을 호국의 별이 됐다. 또한 내외신의 종군기자들은 이 전투를 ‘백마산의 태극기’라는 표제로 보도해 세계의 주목을 받게 했다.
백마고지 전투 중 피아간에 엄청난 양의 포탄이 백마고지에 떨어졌다. 중공군이 5만5000발, 아군이 21만9954발의 포탄을 발사함으로써 총 27만4954발이라는 막대한 양의 포격이 이 작은 고지에 집중됐다. 유엔군의 항공기도 754회나 출격해 폭격을 가함으로써 고지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남지 않았다. 극심한 폭격과 포격으로 고지의 수목이 모두 없어져 하얗게 된 민둥산의 모습이 마치 백마(白馬)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후부터 395고지 일대를 백마고지라 부르고, 이후 9사단을 백마부대라고 부르게 됐다.
[김영선 장군이 말하는 백마고지전투-후송 거부한 부상병들 진지에 남아 악전고투]
백마고지 전투 당시 9사단 30연대 1대대장으로 전투에 참전했던 김영선(육사 7기ㆍ예비역 중장) 당시 소령은 1970년대 초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 전투 경험담을 상세하게 증언했었다. 김영선 장군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백마고지 전투의 실상을 살펴 본다.
개천절이자 추석이 겹친 10월 3일 나는 대대 지휘소에 대기하고 있었는데 연대 작전주임으로부터 긴급 연락이 있어 작전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날 6중대 정면으로 귀순한 중공 114사단 340연대 2대대 7중대 소속 군관인 곡중교의 진술 내용을 들었다.
그것은 중공 38군장의 직접 명령에 의해 다음날인 10월 4일에 적이 대대적으로 백마고지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또 적은 이 공격에 앞서 평강 부근의 봉래호 수문을 열어 백마고지 동남쪽으로 흐르는 역곡천을 범람케 해 고지를 고립시킨 다음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에 따라 긴급 작전회의가 열렸으며 이에 대한 대책이 숙의됐다. 이 결과 연대장 임익순 대령은 우선 백마고지가 고립될 때에 대비해 일주일 이상을 지탱할 수 있는 병력을 확보하고 보급품이 집적돼야 한다는 판단 아래 3대대를 백마고지로 증원토록 조치했다.
이리하여 3대대는 10중대가 담당했던 정면과 3중대 정면 일부를 담당하고 11중대를 낙타능선으로 추진시켜 전진진지를 확보해 만반의 방어태세를 갖췄고 충분한 보급품이 노무자에 의해 계속 추진됐다.
한편 나는 봉우리를 뺏기면 다른 봉우리를 지킬 수 있도록 각 중대가 봉우리 단위로 사주방어 진지를 편성했다.
둘째로 적의 포격에 대비해 교통호를 한 길 이상의 깊이로 파 엄체호를 보강했다. 진지 전방의 철조망 3선을 7선으로 하며 지뢰를 조밀하게 매설하고 통신 와이어를 교통호 안에 전부 묻었다.
이와 같은 조치가 끝난 다음 나는 전 장병에게 “이제 우리는 죽어도 이 고지에서 죽고 살아도 여기에서 살아야 하다. 우리는 다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 이기자”라고 일장 훈시를 하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그런데 적의 공격예정일인 10월 4일에 막상 별다른 상황이 없자, 장병들은 다소 맥이 풀리는 듯했다.
10월 6일 오후 7시쯤에 이르러 드디어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최초에는 제3대대 정면으로 공세를 집중하더니 밤 8시쯤에는 3중대 정면으로 확대해 갔다.
밤 10시40분쯤에는 적의 포격으로 통신이 두절돼 각 중대의 전황을 파악할 수 없어 직접 각 중대에 나가 보았더니 포격으로 무전기가 파손되거나 안테나가 절단돼 통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2시쯤 적의 세 번째 공격이 시작됐는데 이때 적의 포격이 어찌나 심하던지 교통호가 전부 무너지고 흙먼지로 발목이 묻혔으며 진지 부근에는 피아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부상병들은 한결같이 후송을 거부하고 사력을 다해 끝까지 진지를 고수하는 눈물겨운 정경이 벌어졌다.
7일 오전 6시쯤 적은 드디어 퇴각하기 시작했다. 우리 대대는 적 1000여 명을 사살하고 10명을 포로로 했으며 각종 소총 202정과 다발총 49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고 서전을 빛냈다.
<정리=김병륜 기자 lyuen@dema.mi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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