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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18 09: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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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조선일보]나와 6·25-미니 전사(戰史)[4] 국군의 방어계획
48년 대대적 숙군, 좌파 제거… 내부 단결·반공의식 다져 北의 남침 징후 농후해지자 50년 1월에야 방어계획 마련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군 안팎에선 좌익·공산세력에 의한 반란과 폭동이 극에 달했다. 제주 4·3사건과 여수·순천 10·19사건, 대구 주둔 6연대반란사건 등은 막 태동한 국군에게 심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우리 군은 반란군 진압과 대대적 숙군(肅軍)을 통해 오히려 내부적 단결과 철저한 반공의식을 다졌고, 이는 6·25 전쟁 초기의 열세를 딛고 반격에 나설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이어진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일단 무력남침이 시작되면 남한 내 군과 민간의 남로당 세력과 그 동조자들이 일제히 봉기, 북한군을 도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오판으로 결론났다.

국군이 38선에 대해 독자적 방어에 나선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약 6개월 동안에 이뤄졌다. 미군은 1948년 9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 주한미군 1만6000여명 중 대부분을 철수시켰고, 이어 6월 말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제5연대전투단을 철수시켰다. 이후 남한엔 500여명의 군사고문단만 남았다.

육군본부는 1949년 12월 북한의 무력이 증강되고 남침 징후가 농후해지자 1950년 1월 말 처음으로 전군(全軍) 차원의 방어계획 시안을 마련했다. 그 전에는 지역 사단 차원의 방어계획만 있었다.

국군의 방어개념은 방어지대를 '경계지대' '주방어지대' '예비진지지대'로 구분했다. 1차로 경계지대에서 북한 공격을 저지하고, 주방어지대에서 결전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주방어지대 방어에 실패할 경우 예비진지지대를 확보해 그곳에 별도의 증원부대를 투입, 역습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이때 설정된 방어선은 주문진 남방~춘천 북방~마차산(587고지)~임진강 일대를 연결하는 선이었다. 육본은 이 내용을 1950년 3월 25일 작전명령 제38호로 각 부대에 하달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계획을 따라가지 못했다. 국군의 무장력은 북한에 비해 절대적 열세였다. 국군의 소총·권총 등 소화기는 10만정, 대포는 105㎜ 91문에 불과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이승만 대통령 지시에 따라 1949년 9월 북한군을 막을 전차 189대 지원을 요청했지만, 미군측 군사고문단은 "한국의 지형과 도로, 교량 등에 비춰볼 때 전차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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