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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12.09.11 16: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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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7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기획-국난극복사<66>또 한 번의 위기 신미양요

<66>또 한 번의 위기 신미양요

미국의 통상 요구 거절…미함대 상륙작전 감행 / 2012.09.05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 결사항전…군인 본분 다해

어재연의 필적, 필자제공 사진

손돌목 돈대의 돌출부 용두돈대. 필자 제공 사진

5년 전 평양에서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통상을 요구해왔다. 1871년 5월 로저스(John Rodgers)가 지휘하는 5척의 미군 함정이 조선으로 출항했다. 탐색대 활동을 시작으로 조선 측과 접촉한 그들은 미국 측의 입장을 전달했다.


▶조선군, 미 함대에 포격을 가하다

 몇 차례 서신을 교환했으나 조선 정부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 어떤 교역이나 조약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일전을 치를 각오였다.

6월 1일부로 어재연(魚在淵, 1823~1871)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삼아 전투태세를 갖췄다. 19세로 무과에 급제한 어 중군은 무관 생활 30년의 베테랑이었다. 주변의 염려에도 “나라에서 두터운 은혜를 받고도 조금의 공헌이 없었으니 이제 참으로 나라에 보답할 때다. 어찌 두려워함이 있으랴”라고 주저하지 않는 그였다.

 조선군과 미군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강화해협의 손돌목이었다. 물살이 빠르고 굴곡이 심해 선박의 항해가 곤란한 손돌목 어귀에 지휘소(광성보)를 마련한 조선군은 미군 함대의 북상을 예의주시했다. 마침내 미군 탐색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조선군이 신호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80여 발의 포탄이 팔로스와 모노카시 함대에 쏟아졌다. 그러나 도리어 조선군이 미군 함대의 화력에 밀려 인근 야산으로 피신해야 할 판이었다.

블레이크(Homer C. Blake) 중령의 탐색대가 조선군의 요새를 완전히 제압했다.


▶미군의 진격, 광성보로 향하다

 손돌목 사건 직후, 미국 측은 조선이 6월 9일까지 사죄와 보상에 관한 약속을 통보해 오지 않으면 10일 상륙작전을 감행하겠다고 했다. 상륙부대의 수장은 블레이크 중령. 드디어 작전이 개시됐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의 최종 목표는 광성보였다.

 광성보에서는 6월 2일부터 진무영 중군 어재연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어재연이 끌고 왔던 훈련도감군을 비롯한 중앙군 5초 625명이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1000여 명의 주둔 군사와 각종 대포 143문도 조정 배치했다. 결사항쟁의 의지를 말해주는 듯이 광성보 포대에 ‘수자기(帥字旗)’가 높이 내걸렸다.

 어재연은 폭우처럼 쏟아지는 탄우 속에서도 조금도 겁내지 않고 장대(壯臺) 위에 꼿꼿이 앉아 수비병을 독려했다. 11일 정오, 광성보 정상의 원추형 손돌목 돈대에 미군의 함포사격이 개시됐다. 때맞춰 봉화곡 일대에서 킴벌리 중령의 상륙군 부대도 4문의 곡사포를 작렬시켰다. 해상에서는 미군 지원부대의 8인치 함포사격이 불을 뿜었고, 후방 상륙부대의 곡사포까지 가세한 전후방 협공이었다.


▶조선군의 장렬한 최후

 미군 기록에 의하면, 당시 광성보 일대에는 서양의 어떤 선율로도 표현할 수 없는 소름 끼치는 ‘만가 같은 임종가(a dirge-like death chant)’가 정상에서 울려 퍼졌다고 한다. 필경 어재연 이하 조선 군인들의 최후 통곡이었을 것이다.

 미군 상륙부대가 해발 40m 구릉을 기어올라 손돌목 돈대에 돌입했다. 혼전이 벌어졌다. 육박전이었다.

어재연은 천총 김현경과 함께 피를 마시며 “죽을 때까지 싸우되, 결단코 후퇴하지 말자”고 맹세했다. 그는 도망치려던 한 병졸에게 초연하게 “죽을 때가 되면 진실로 죽을 뿐이다. 너희가 항오를 짠 지 몇 해가 됐는데, 어찌 오늘에 죽음이 있을 줄을 몰랐더냐!”라며 호령하니 도망가던 군졸도 멈춰 섰다고 한다.

 조선군 수비대는 350여 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포로가 됐다. 일부는 포로 되길 거부하고 칼로 자결하거나 몸을 바다에 던졌다. 미군 측은 맥키(H. W. McKee) 해군 대위를 포함한 3명의 전사자와 약간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미군들은 조선군의 죽음에 감동을 받았다. 슐레이(W. S. Schley) 해병 소령은 술회했다. “조선군은 노후한 전근대적 무기를 갖고서도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해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은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이들을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어재연의 행장에도 조선군의 최후가 묘사돼 있다. “공은 장대에 끄떡없이 앉아 두려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 피가 흘러 얼굴을 씻는 듯이 힘껏 싸우며, 손수 화포를 당기다 탄환이 다하면 칼을 휘두르고 칼이 부러지면 대포 자루로서 두드리고, 다시 모진 돌로써 계속해 응수했지만 죽고 다친 자가 몹시 많았다. 해 그림자가 옮겨감에 군세가 궁해지고 힘은 다해 마침내 몸으로써 순절하니 곧 사월 이십사일 신시였고, 사신 나이 사십구 세를 얻었다.”


▶조선군의 죽음, 그 남겨진 유산

 중과부적이었지만 어재연은 나라의 명을 피하지 않고 군인의 본분을 다했다. 그들이 보여준 ‘불사불멸의 정신’은 살아 있는 조선 군인의 혼이었다. 그들은 오직 ‘충’과 ‘의’의 사표였다. 그런 조선 군인의 감투 정신은 장차 의병전쟁에서도 또다시 발휘될 것이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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