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미군의 개입은 한국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총력을 기울여 한국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180만 명의 병력을 파한, 3만7000명이 전사하고 10만 명이 부상했다. 37개월 동안의 전쟁에서 신생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운 미군의 희생은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미국은 모든 희생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미국은 대통령 아들부터 미국의 희망이자 자존심인 하버드대학교의 대학생, 그리고 평범한 일반 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한국이 공산화되는 것을 방지코자 최선을 다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은 외아들을 각각 최전선 대대장·중대장으로 내보냈고,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장군도 아들을 최전선의 중대장으로 싸우게 함으로써 미군 중대장 중에서 가장 많은 부상을 입고 중태에 빠져 미국으로 후송되기까지 했다.
그 가운데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중장의 외아들은 전폭기 조종사로 출격했다가 적의 대공포에 의해 전사했고, 미 1해병비행단장 해리스 소장의 아들은 해병대 대장으로 참전해 장진호전투에서 전사했다. 또 미24사단장 딘 소장은 본인에게 주어진 대전 사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다가 적의 포로가 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으며, 미9군단장 무어 소장은 1951년 2월 킬러작전을 위한 헬리콥터 공중정찰 중 군단장 부임 3주 만에 헬기 추락사고로 전사했다.
특히 한국민을 가장 가슴 아프게 한 죽음은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의 전사다. 제2차 세계대전 시 가장 훌륭한 장군으로 평가했던 패튼 장군은 워커의 중장진급 시, 자신이 아이젠하워 장군으로부터 받은 3성 계급장을 워커에게 달아줬고, 한국전선에서 그는 그 계급장을 달고 패튼처럼 용감하게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북한의 기습남침을 받고 한국의 운명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때 주한 유엔군 지상군사령관에 임명돼 한국을 위기에서 구했던 용장이다.
그는 패튼 장군의 후계자라는 명성에 걸맞게 특유의 뚝심과 투혼을 발휘해 지연전에 이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불리한 전력에 구애받지 않고 오히려 위기를 호기로 바꿔 총반격 작전의 기틀을 마련,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공군 30만 명의 불시공격을 받고 유엔군이 38도선으로 철수해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불행히도 자동차 충돌사고로 전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한국인의 진정한 벗”이라며 애도했고 서울시민은 그 비보를 듣고 집집마다 조기를 게양하고 비통해했다. 미국 정부는 그를 대장(大將)에 추서해 그의 전공을 기렸다. 하지만 한국의 은인인 그는 한국에서 아주 잊혀진 인물이 됐다. 그가 죽은 장소에는 추모비조차 세워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한국을 위기에서 구원한 워커 장군에 대한 추모사업은 6·25 때 장교로 참전했던 독지가(김리진·고 워커 대장 추모기념사업회장)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다. 장군이 전사한 정확한 장소도 김리진의 오랜 노력 끝에 확인됐고(서울 도봉구 도봉동 596-5), 워커힐에 세워진 장군의 기념비도 그가 사재를 털어 87년 건립했다. 장군의 아들 샘 워커 대장은 그 고마움의 정표(情表)로 부친이 패튼 장군으로부터 받은 3성 계급장을 그에게 기증했다.
12월 3일은 워커 장군의 119번째 탄신이고 23일은 서거 58주년이 되는 날이다. 6·25 때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산화한 그의 죽음은 매우 값진 것이다. 미국 독립전쟁 시 미국을 구원했던 프랑스의 라파예트 장군을 기려 미국이 동상을 세워 그를 ‘미국의 영원한 은인’으로 숭앙하듯, 한국도 국력에 걸맞은 문화국민의 긍지를 살려 워커 장군의 죽음에 보답해야 될 때가 도래했다고 본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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