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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6 08: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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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27>병영시설·간부숙소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27>병영시설·간부숙소
1966년부터 통합막사 건립 대대적 추진

창설 초기 우리 군의 병영시설은 기본 막사는 물론 난방·취사시설, 화장실·목욕탕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상태였다.

6·25전쟁 직전까지 부대 수가 늘어나면서 국군의 막사는 토담집이나 초가집이 주류를 이뤘다. 그후 6·25전쟁으로 불비한 여건에서 천막·보조막사와 토조시설이나 미군에게서 인수받은 조립식 퀀셋 건물에 의존했다. 또 57년까지 전군에 필요한 신영공사를 전개했는데, 당시 적절한 공사통제가 결여됐기 때문에 각급 부대 재량으로 시공하고 현지조달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국군의 감군이 시작된 58년부터는 석조건물이 등장했다. 60년 감군을 완료할 때까지 신영시설의 건립을 위해 군원 513만 달러와 원화 3억2700만 원이 투입됐다. 이때 석조시설은 현지 조달이 가능한 공사의 시공을 허용했기 때문에 시설확보를 위한 각급 부대의 임의 시공이 절정에 달했다.

60년대의 군 시설은 경기도 양수리에 약 17만 달러에 달하는 군원장비를 투입한 블록공장이 설립돼 61년부터 5년간에 걸쳐 시멘트 블록·기와조가 주류를 이뤘다. 군원의 감소에도 시설투자가 종래 연평균 300만 달러 내외보다 70%가 증가된 540만 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구·계획적인 공사가 시작됐지만 여전히 복지위생시설은 미비했다.

그러다 66년부터 병영시설개선 차원에서 통합막사의 건립이 대대적으로 추진됐다. 당시 병영시설 대부분이 재래식 단층 건물이었는데, 통합막사는 현대식 2층 건물로 내무반·교실·화장실·목욕탕·세면장·창고 등을 일괄 건축한 것이다. 67년 그 일부가 건립됐고 68년 이후에도 군원계획으로 지속 추진됐다. 이로써 현대식 철근 콘크리트조와 철골조에 의한 병영막사가 일반화했다. 그리고 간부숙소 개선에 관심이 진작돼 68년 정부 예비비로 원주에 아파트 30가구를 건립하고, 미국의 지원으로 부사관 숙소 21개 동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 무렵 군은 시설현대화와 장기계획에 의한 시설 표준화를 시도하는 한편, 70년까지 주요 도심지 군시설의 교외이전계획을 수립하고 착수에 들어갔다. 67∼68년 2군사령부 이전이나 유성의 ‘병사의 집’ 건설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71년부터 군원이 완전 삭감돼 순수한 원화예산 안에서 군 시설물은 지역별로 구분해 전방은 블록 슬레이트조로 후방은 라멘조로 시공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75년부터는 율곡시설사업으로 추진돼 일반 병영시설은 79년까지 블록 기와조를 블록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량하며 공사기법에 현대적 감각을 가미했던 것이다.

이 같은 70년대 말까지의 군 시설은 전후 미군에게서 인수한 퀀셋 건물과 60년대 이후 군 자체 병력으로 건립한 슬레이트 시설이 약 73%를 차지한 것이다. 따라서 80년대에 들어와 국민생활의 질적 향상에 따른 신세대 병사들의 사고에 부응해 현대식 병영시설의 건설을 추진했다. 82년 사업을 착수해 그해 17개 대대를, 85년까지 47개 대대를 현대화했고, 그 후 매년 30개 대대를 목표로 1000개 대대의 현대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92년 이후 병영시설 현대화는 전 병영시설의 현대화에서 병사 필수시설 위주의 현대화와 기존 내무반 개수를 병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숙소의 공급 또한 87년까지 조달본부에서 집행하던 아파트 건립사업을 각군으로 이관했다. 이로써 군 자체건설에다 민간아파트를 매입, 분양하거나 임대해 공급했고 가구별 기준 평수도 종래 19·20평형에서 국민주택 규모의 19·31평형으로 상향 조정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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