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조선은 개항 이후 일본·청·러·미식 군제에 의한 군사개혁을 시도했는데, 군 복제 역시 별기군이 전통 한복을 입은 것으로부터 군제가 바뀔 때마다 각국 복제의 영향을 받았다. 그 후 1895년 칙령 제78호에 의해 서양식 군복을 착용했고, 다시 일본 군대 복제에 영향을 미친 독일식과 프랑스식을 따르기도 했다. 아관파천 후에는 러시아식 군제의 영향에 있었지만 복식만큼은 ‘육군복장규칙’을 개정하고 프랑스식에다 한국적 상징의 복식품을 곁들여 자주적 의지를 드러냈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은 2년 후 원수부를 설치해 군권을 장악했다. 곤룡포를 입었던 황제가 육군복장규칙에 준해 양복형 군복을 입은 것도 이때부터다. 이 제복은 원수부가 폐지된 1904년 9월까지 착용했으며, 일반 장병도 1900년에 서양식 복제로 바꿔 을사조약이 늑결되고 군대가 강제 해산된 1907년까지 착용했다. 바로 그해부터 일제의 징병제도와 학도지원제도가 실시돼 일본군 복제를 따랐던 것이다. 대한제국 최후의 군대인 조선보병대가 1931년 해산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소 20여 년은 일본군 복제에 따른 셈이다.
한편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우리 군은 의병의 기의를 시작으로 독립군과 광복군으로 맥을 이어 갔다.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광복군은 일정한 제복 없이 사복을 착용했으나 일부 대원들이 중국군 군복을, 버마 전선의 연합작전에서는 영국군 카키색 군복을 입었다.
현대 국군의 복제는 변천을 거듭하다가 1960년대 제반 국방법령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국가발전과 경제성장에 힘입어 재정립됐다. 조선경비대의 창설 이후 정부 수립을 통해 국군으로 정식 발족된 후 1953년 7월까지는 미 군정기에 일본군 군복을 지급받아 원형 그대로 착용하다가 이를 다소 개정해 우리의 표지장 및 복식품을 부착했으나 일본식 각반을 찼다. 1946년 9월부터 미군복이 보급됐기 때문에 육군 피복창에서 생산한 전투복과 함께 6·25전쟁 때까지 혼용했다. 전투복은 국방색의 면직이고 전투모는 원통형에 귀덮개가 부착돼 있었다.
1954년에서 1965년까지는 휴전 후 안정된 제복을 착용하기 위한 제반 노력으로 복장규칙의 정비와 함께 전투복이나 타 제복을 동시에 개정했다. 기본형은 종래와 다르지 않았지만 주머니나 깃의 형태에 변화가 있었다. 그 유형은 6·25전쟁 직후에 미군이 전투복을 겉붙임 주머니형으로 바꾸자 국군도 1954년부터 미군 전투복과 유사한 형태를 취했다. 특수임무 수행자의 전투복은 1959년 얼룩무늬로 바꿨다. 특히 종래 완제품으로 도입하던 군복을 1954년부터 복지로 도입해 군 피복창에서 제조·공급했고, 1960년대에는 순수한 국산복지로 대체했다. 건군 이래 각군이 독자적으로 시행하던 군 복식은 1962년 이후 각령으로 그리고 1967년부터는 대통령령으로 규제해 관리했다.
1965년 이후 군 복제는 정착단계에 들어갔다. 당시 전투력 증강이 요구되던 상황에서 전투복의 정비소요가 증대되자 팔꿈치나 엉덩이 등에 동일 복지로 덧붙임을 했고, 1967년 작업모와 작업복을 전투모·전투복이라 개칭하고 외출할 때 덧붙임이 품위가 없다 해서 종래대로 단일 복지로 환원했다. 또 파월장병들에게는 전술행동에 편리하도록 뒷주머니가 달린 전투복에다 땀 발산이 쉽도록 정글화를 신게 했다.
1970년대부터는 국가의 경제성장에 힘입어 한국인 체형과 고유한 전통성을 갖춘 군복을 토착화하며 국제적 우수성을 과시했다. 1970년 군복의 민영 조변화가 이뤄졌고, 1975년에는 전차병의 전투복을 얼룩무늬로 바꿨다. 1990년 11월 23일 얼룩무늬 위장색 전투복은 현대무기와 전술적 목적에 따라 주야간의 감시장비로부터 보호받는 군의 기본 군복이 됐고, 해외파병 시 지역 특성을 고려해 흑색·녹색·갈색·모래식으로 구성한 얼룩무늬 위장색을 착용했다. 그 후 2007년부터 해외파병 부대나 특전사 복장은 디지털무늬화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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