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군방송은 6·25전쟁 시 국방부가 KBS망으로 전황보도(제1호)를 한 후 중앙방송국을 인수해 전파통제를 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정훈국장 이선근 준장이 직접 방송으로 담화문을 발표하고 전군에 비상선포를 알려 국민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선무방송을 실시한 것이 최초의 군방송이었다.
당시 방송계장이던 홍천 중위(정훈1기)는 6월 27일 인민군이 의정부를 돌파하자 방송요원 10여 명과 함께 정동연주소를 지키며 방송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다음날 새벽 2시쯤 그는 저 하나도 건너기 힘든 아수라장의 한강 인도교를 방송장비까지 가득 싣고 건넜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도강했을 무렵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다. 엄청난 모험이었던 이날의 일을 그는 훗날 ‘방송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전쟁 중에 군방송은 대전방송국과 대구초등학교, 부산방송국에서 방송을 실시하다가 전후에는 대북심리전 방송으로 전환해 서울중앙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제작·편성·송출했다. 이는 국방부 보도과 주관 아래 공보처와 협조해 매주 3회(1회 15분) 국군의 시간을 정해 방송한 것인데, 1954년 9월 1일부터 KBS 정동연주소 별관에 간이사무실과 녹음실을 마련, 매일 2회 45분씩 방송함으로써 본격적인 국군방송의 길이 열렸다.
그러던 중 5·16이 일어나고 군방송이 중시되면서 공보부 직속의 KBS 제2방송에서 송출하던 것을 제1방송으로 환원했다. 62년 8월 21일에는 정동연주실을 남산연주실로 옮겨 군방송 전용 스튜디오를 확보하고 최신 장비도 갖췄다. 특히 장근환 대령이 방송부장으로 부임해 국군방송의 위상을 강화했는데, 후일 그는 국방부 정훈국장(19대)과 육군정훈감(19대)으로 취임해 군 정훈·방송 분야에 크게 기여했다.
한편 63년 12월 정부 각료회의에서는 국군방송실 직제를 정식 제정했으며, 방송기능이 각령 제1732호에 따라 방송과는 군방송실로, 영화과는 국군영화제작소로 각각 국방부 직할기관화했다. 국회에서는 베트남 파병에 즈음하여 한국어 방송국 설치를 의결하고 현지 방송국에서 시험방송을 거쳐 66년 4월 15일 퀴논방송국과 맹호방송국을 개국해 1일 7시간씩 우리말 방송을 실시했다. 그 후 67년 2월 사이공방송국, 4월 나트랑방송국, 68년 3월 호이안방송국을 개국하고 백마부대 주둔지인 투이호아 중계소를 설치·운영했다.
국군방송은 68년 4월 향토예비군 창설 이후 ‘예비군의 시간’을 할당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했다. 71년 4월 5일부터 방송분량을 1일 70분으로 늘렸고, 주파수 대역을 970Khz로 지정했다. 그 무렵 국방부는 산하 홍보매체에 대한 통합관리를 위한 ‘정훈종합센터’의 건립을 추진했으며, 이로써 국군방송실·국군신문제작소·국군영화제작소를 통합하는 계기가 마련됐다.
75년 11월 27일 방송국 청사가 서울 용산2가에 건립됐고, 81년 11월 2일 국군홍보관리소가 정식 창설됐다. 국군방송은 78년 1월부터 FM 방송망을 확보해 1일 3시간씩 정규방송을 실시했고, 90년대에는 스테레오 방송시대를 열었다. 93년 11월부터 송출시간도 하루 6시간에서 8시간으로 2시간 연장했다.
그리고 2001년 1월 국군홍보관리소는 책임운영기관으로 거듭났다. 경영혁신 차원에서 기관장을 특별채용하고 독립채산제로 운영방식을 전환했으며, 명칭도 그해 8월 28일 대통령령 제16958호에 의거 국방홍보원으로 개칭했다. 국방홍보원은 2006년 12월 1일 국군TV를 개국, 디지털미디어 시대의 군 종합미디어센터로 발돋움했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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