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백미(白眉)는 단연 맥아더 장군이 구상하고 실행했던 인천상륙작전일 것이다. 이는 삼국지에서 유비·손권의 연합군이 조조군을 대파하고 승기를 잡은 적벽대전(赤壁大戰)에 비견된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 초기 아군에 불리하게 전개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고, 총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20세기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이었다.
크로마이트(Chromite)로 알려진 인천상륙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최대 규모의 8개국 함정 261척으로 구성된 ‘연합함대’와 한미 해병·육군으로 편성된 7만5000명의 상륙군이 참가했다. 이 규모는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혈투를 벌이며 싸우고 있는 아군 전력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구상과 강력한 의지에 따라 결행됐으나, 그 성공의 이면에 숨은 최대 공로자는 한국 해군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작전일(D-day)은 1950년 9월 15일이나, 한국 해군은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훨씬 빨리 작전을 전개해 작전 성공에 크게 일조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최종 확정한 것은 작전일을 한 달 앞둔 8월 12일이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1년 동안 전 역량을 투입해 준비한 노르망디 상륙작전과는 비교가 안 됐다. 맥아더는 이런 불리한 점을 만회하고자 한국 해군을 적극 활용했고, 한국 해군은 맥아더의 이런 기대에 부응해 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확정한 이날 해군총참모장 손원일(孫元一) 제독은 미 극동사령부로부터 상륙작전에 필요한 첩보수집 명령을 받고, 해군본부 정보국장(함명수 소령)을 호출해 이에 필요한 첩보수집 임무를 하달, 차질 없이 준비토록 했다.
그 과정에서 손제독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인천상륙 계획을 보고하자, 대통령은 3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정일권 소장)을 부산 경무대로 불러 기쁨을 나눴다. 이 자리에서 이대통령은 손제독에게 “애드미럴 손, 잘해 주시오. 정보를 잘 수집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반드시 성공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오. 우리의 생사가 이 작전에 달려 있습네다”라며 간곡한 어조로 당부했다.
이렇듯 한국 해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보다 1개월 빨리 시작됐다. 한국 해군은 첩보수집의 원활한 임무수행과 차후 상륙작전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인천수로 입구의 영흥도·덕적도 등을 탈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에 대한 작전을 전개했다. 도서 탈환을 위해 8월 16일 금강산 함장(이희정 중령)의 지휘하에 8척의 함정이 동원됐고, 각 함정에서 선발된 110명의 승조원으로 상륙부대(중대 규모)가 편성됐다.
상륙부대는 덕적도·영흥도를 차례로 탈환하고 이들 섬의 치안을 확보한 후 귀함(歸艦)했다. 섬이 확보되자 한국 해군은 첩보수집에 나섰다. 함명수 소령을 대장으로 한 특수첩보대는 총 17명이었다. 이들은 8월 24일 영흥도에 상륙해 정보수집, 즉 북한군의 무기와 병력 등 적의 방어태세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9월 1일 영흥도에 상륙한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국 소속의 클라크(Clarke) 해군대위를 통해 맥아더사령부로 즉각 보고됐다. 이들은 9월 14일까지 임무를 성공리에 수행한 후 철수 명령을 받았으나, 철수 과정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임병래 소위, 홍시욱 병조장이 동료들의 철수를 위해 끝까지 항전하다 보안을 위해 자결했다.
한국 해군의 이런 숨은 희생과 노력이 5000 대 1이라는 인천상륙작전의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 한국 해군의 업적은 국군사의 귀감으로 영원히 빛날 것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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