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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08.09.08 13:3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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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7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83>장사동 상륙작전과 학도의용군 그리고 전성호 장군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83>장사동 상륙작전과 학도의용군 그리고 전성호 장군
인천상륙위해 동해안서 펼친 양동작전

6·25전쟁에서 장사동(長沙洞)은 매우 유서 깊은 전적지다. 장사동은 경북 영덕에서 남쪽으로 15km, 포항 북쪽 26km에 위치한 동해안의 작은 어촌이다. 이곳은 1950년 8월 16일 국군 제3사단이 북한군 제12사단이 기계·안강으로 진출해 기습적인 포항 점령으로 퇴로가 차단당하자 해상 철수를 실시했던 독석동과 인접해 있다.

장사동이 유명하게 된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기만하기 위해 실시한 양동작전이 인천상륙작전 바로 전날인 50년 9월 14일 이곳에서 실시됐기 때문이다. 또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의 대부분은 경남 밀양에서 불과 보름 동안의 훈련밖에 받지 않은 학도의용군이었다.한국 육군은 이 작전을 위해 이명흠(李明欽) 대위를 지휘관으로 한 독립유격대 1개 대대를 차출했다.

이명흠 대위의 가운데 이름을 따 일명 ‘명부대(明部隊)’로 불리는 이 유격대는 8월 말쯤 밀양에서 학도병을 기간으로 조직된 부대다. 이들은 오로지 애국심만으로 군에 자진 입대해 위험한 작전에 투입됐다. 성공적인 작전을 위해 광복군 출신으로 유격전의 권위자인 전성호(全盛鎬) 대령을 전술고문으로 위촉했고, 중국군 소장 출신으로 이 분야에 경험이 풍부한 박영선을 정략고문으로 삼았다. 미 해군에서는 해리슨 중위와 하사관이 연락 임무를 위해 동승했다.

유엔군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 직전 반대편인 동해안의 장사동에 기습 상륙을 감행해 적을 견제하면서 경인(京仁)지역에 대한 북한군의 증원을 방해하고자 이 작전을 계획했다. 학도의용군으로 편성된 상륙부대를 태운 한국 해군의 문산호(LST)는 미 해군구축함의 호송하에 9월 14일 오전 장사동 해안에 도착했다.

이때 태풍(케지아)의 영향으로 장사동 남쪽 해안으로 접근하던 문산호는 심한 파도에 밀려 결국 좌초됐고, 설상가상으로 내륙에 배치된 적으로부터 맹렬한 사격을 받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상륙부대의 긴급구조 요청에 따라 미군에서 해군 구난선을 보냈으나, 문산호가 너무 깊이 좌초된 관계로 구조하지 못하고 구룡포로 복귀했다. 육군에서도 조치원호를 보냈으나 적의 공격으로 677명만을 구조했다.

한편 적과의 불리한 교전 과정에서 전술고문 전성호 대령이 9월 15일 전사했다. 그는 전투를 지휘하다 대퇴부에 적탄을 맞고 전사(55세)했다. 정부는 그의 1주기인 51년 9월 15일, 그의 전공을 기려 육군준장에 추서했다. 함북 경성 출신인 전 장군은 전쟁 초기 1사단 12연대 연대장으로 6월 25일 개성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됐다 장사동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그는 일찍부터 독립군에 투신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의 장남 전대영(全大榮)은 봉천군관학교를 나와 국군 장교로 근무했고, 차남 전해종(全海宗)은 일본 동경제국대학 사학과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갔다 광복 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 동양사학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렇듯 장사동 기습상륙작전은 적을 기만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일조(一助)했다.

이 작전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실시된 소규모 상륙작전이었으나 동해안의 북한군에게 준 심리적 타격은 컸다. 당시 평양방송은 아군 2개 연대가 동해안에 상륙했다고 보도할 정도로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뿐만 아니라 동해안에서 작전하고 있던 국군1군단의 총반격작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여기에는 꽃다운 나이에 희생한 학도의용군과 부상에서 복귀한 후 어려운 전투에 기꺼이 참가한 전성호 장군의 구국항전(救國抗戰)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국방일보-200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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