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사에서 밴 플리트 대장은 전쟁영웅·전투장군으로 유명하다. 그는 6·25전쟁 때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한 참모가 철수를 운운하자, “나는 철수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 여기 왔다. 나와 함께 일하기 싫다면 당장 집으로 보내 주겠다”라고 말해 미8군의 분위기를 전투모드(mode)로 일신했다. 그는 이런 신념하에 군사령관 직책을 수행했고, 재임기간 내내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며 남다른 애착을 갖고 도움을 줬다.
특히 그는 미래를 조망해 보는 탁월한 안목으로 한국군의 증편과 4년제 육군사관학교 창설에 선구적 역할을 했고, 퇴역 후에도 아버지처럼 받들며 존경한 이 대통령과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그는 강한 책임감·용맹성·뛰어난 리더십·친화력을 갖춘 명장이면서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1남 2녀를 둔 밴 플리트 가정은 군인 가족의 상징이었다.
미8군사령관 당시 그의 사위 둘은 육군중령으로 웨스트포인트에 근무하고 있었고, 외아들(밴 플리트 2세)은 공군중위(B-26 조종사)로 한국에 자원해 아버지와 함께 최전선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가족과의 오랜 이별을 편지로 달랬다. 부전자전(父傳子傳)처럼 그의 아들도 아버지처럼 편지로 가족 간의 우애를 다졌다.
밴 플리트 2세는 그리스에서 해외근무를 끝마치자, B-26 전폭기 조종훈련을 받은 후 곧바로 한국전 참전을 자원했다. 한국 전선에 가게 된 그는 ‘군인의 아내이자 군인을 아들’로 둔 어머니께 마지막 유서가 될 감동 어린 편지를 썼다. 그는 서두에서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고, 전투간 B-26을 조종해 다른 승무원(항공사·폭격수·기관총사수)과 함께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고 계시는 아버님에게 조그마한 힘이 돼 주기 위해 갑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제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가 있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의무입니다”라고 끝을 맺었다. 어머니 하고는 이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편지였다. 한편으로 그는 미8군사령부를 방문해 아버지의 60회 생신(3월 19일)을 축하했고, 실종 이틀 전(4월 2일) 마지막으로 통화했다.밴 플리트 2세는 1952년 4월 4일 01:05분, B-26기를 타고 군산비행장을 이륙해 압록강 남쪽 80km 지점의 북한 순천지역에 대한 야간폭격 임무를 수행했다.
이것은 그의 네 번째 출격이면서 최초의 단독 폭격임무였다. 그는 03:00쯤 김포공항 레이더에 잡혔고, 03:30분에는 주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새로운 예비 표적을 받고 날아갔으나 그 후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밴 플리트는 10:30분 미5공군사령관(에베레스트 중장)에게 이 소식을 듣고도, 다음날(4월 5일) 태연하게 국군2군단 창설식에 참석했다. 그는 아들이 실종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중공군 부사령관으로 참전한 홍학지가 그의 회고록에서 “밴 플리트 장군 아들이 탄 B-26기를 격추했고 기체 폭발로 조종사 잔해는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적지 영공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 중 가장 값진 자식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도 못하고 떠나보내는 단장의 아픔을 속으로 감내했다. 그의 그런 모습을 한국민은 영원히 잊지 않고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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