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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9 09: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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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70>6·25 이전 이승만 대통령의 방위전략구상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70>6·25 이전 이승만 대통령의 방위전략구상
한국의 독립·안전보장 위해 태평양동맹 추진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수립 이후 미국과의 연합을 뜻하는 연합국방(聯合國防)을 수립하고 한미 군사동맹을 맺고자 노력했다. 이대통령의 이런 노력은 1949년 6월 말 주한미군의 철수로 새로운 고비를 맞았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면서 한국에 방어용 군사장비 이양, 군사고문단 설치, 국군 10만4000명(육군 6만5000명, 해군 4000명, 경찰 3만5000명)의 군수 및 훈련지원만을 약속했다.

이대통령은 49년 5월 17일 무초 대사를 통해 주한미군 최종 철수 사실을 통보받을 때, 그에게 자신이 생각한 ‘한반도 방위전략 구상’을 말했다. 이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 대가로 미국에게 20만 군대를 무장시킬 장비와 100대의 비행기를 요청했고, 북한의 공격이 있을 경우 한국의 독립과 안전을 보장할 한미방위협정체결을 요구했다.

그는 미국에게 대서양조약과 유사한 태평양조약 체결, 한미 또는 다른 국가를 포함한 상호방위협정 체결,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중 미국의 한국에 대한 우호조항을 재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이승만의 태평양동맹 추진은 주한미군 철수가 임박할 때 나온 북대서양조약에 기인했다. 이승만은 미국·캐나다 등 유럽 16개국이 49년 4월 4일 워싱턴에서 북대서양조약에 대한 조인식을 갖자 태평양동맹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이대통령 개인특사로 이미 도미한 조병옥과 장면 주미대사에게 태평양동맹 결성을 미국 정부에 제안하도록 지시했고, 대통령도 중국 장개석·필리핀 키리노 대통령과 공조체제를 유지했다. 특히 이대통령은 49년 5월 2일 “미국이 한국과 군사방위동맹을 체결할 경우 한국의 국내 치안 유지에 크게 도움이 되고, 아시아에서의 반공투쟁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은 “방위동맹을 체결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무초도 5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은 제퍼슨 대통령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동맹을 체결한 적이 없다”라고 말해 동맹체결의 가능성을 부인했다.

이대통령은 다시 북한과 우리 국민에 미칠 심리적 효과를 고려해 한국에 필요한 전력을 지원해 달라고 미국에 요청했으나, 미국은 한국의 산악지형에 전차가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대통령이 북진통일에 이들 무기를 악용할 소지가 있다며 거절했다. 특히 로버츠 군사고문단장은 “한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미국은 경제·군사원조를 모두 중단할 것이다.

미군이 철수할 때 한국군에게 이양한 무기는 전차와 비행기를 제외한 방어무기로 남한이 무력통일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안보공백을 메우기 위해 또다시 진해를 미국의 해군 기지로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처럼 전쟁 이전 이승만의 한반도 방위전략구상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낮은 전략적 평가와 무관심으로 무산됐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억지를 위해 태평양동맹·한미군사동맹·진해기지 제공·국군 전력 증강을 위해 노력했으나, 미국의 소극적 대한정책으로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통령의 전쟁 이전 한반도 방위전략 구상은 6·25전쟁을 거치며 한미상호방위조약·주한미군 주둔·국군 20개 사단 증편으로 실현돼 전후 60년 동안 한반도 전쟁억지 세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이승만의 현실 국제정치를 꿰뚫는 깊은 통찰력과 정확한 인식 판단, 그리고 전후 민족 생존권 보장을 위한 그의 충정에서 우러나온 애국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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