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대한민국 국군’의 출발은 힘찼으나 소련의 지원으로 전쟁준비를 완료한 북한 인민군의 무력침공에는 역부족이었다. 초전부터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국군은 결국 힘겨운 전쟁에서 전력증강의 분명한 목표를 인식했다.
전쟁 전 남북 간의 군사력 격차는 현저했다. 남한은 일반 병력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북한은 기계화·특수부대를 망라한 19만8000여 명이었다. 국군은 전차가 1대도 없었고 인민군은 242대나 됐다. 연습·연락기만 22대였던 아군과 달리 적들은 전투기·전폭기 등 211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현저한 전력 격차 속에서 전쟁은 총력전 양상을 띠었다. 반공정신으로 뭉친 국민들의 쇄도가 이어졌다. 7월 초 바로 학도의용군 약 30여만 명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들 중에는 여자 학도의용군 심지어 재일교포 학도의용군도 있었다. 소년지원병 3000여 명이 낙동강으로 달려가 분전했고, 만 17~40세의 장정 30만 명이 국민방위군으로서 전선에 투입됐다.
부족한 미군 병력을 메운 카투사 4만3000여 명이 미군과 함께 장진호·군우리·펀치볼 등의 사선을 누볐다. 지게부대인 한국노무단(KSC) 30여만 명은 전선의 보급대원이 됐다. 국군과 유엔군 통제하에서 유격부대도 운용됐는데, 호림부대를 비롯해 명·백봉부대, 백골병단, 영도유격대(Y부대), 동키부대와 울프팩 예하의 유격부대, 그리고 제8240·8250부대 등이 그들이었다.
여자 의용군이나 일반 주민들도 무장하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전세의 전환은 유엔군의 참전으로 이뤄졌다. 국제적 연대에 의한 연합전력은 적어도 전선의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았고, 바로 국군의 전투력 증강으로 연결됐다.
소위 ‘밴프리트계획’이라 하는 국군확장계획을 클라크 대장이 적극 추진함으로써 국군은 1954년 11월 무렵에 육군 66만 명, 해군 1만5000명, 해병대 2만7500명, 공군 1만6500명 등 72만 명의 대군으로 늘어났고, 전투력도 체계적인 교육훈련으로 크게 향상됐다.무기와 장비도 육군은 M-36 전차나 155㎜ 곡사포를, 해군은 전투용 함정(PF·PT·PCS·LSSL) 50척을, 공군은 F-51 전투기 80대를 갖추게 됐다.
특히 정전 이후 한미 상호방위조약 안에서 주한미군 철수와 현대화를 전제로 국군의 정원을 63만 명 수준으로 확정하고, 부대의 합리적인 지휘관리를 위해 최초의 야전사인 제1군사령부(사령관 백선엽 대장) 창설을 필두로 후방지원의 제2군사령부와 교육훈련 전담의 교육총본부를 창설해 육군의 군 구조를 정비했다.
이로써 60년 기준으로 육군은 제1군(5개 군단 18개 사단), 제2군(4개 군관구, 10개 예비사단,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군수기지사령부로 재편됐고, 해군은 제1함대를 대한민국 함대로 증편 2개 전단 2개 전대로, 해병대는 제1해병사단을 비롯한 1개 여단으로, 그리고 공군은 제트화를 추진한 제10전투비행단과 제11전투비행단 등을 구비한 전술 공군체제로 발전했다.
결국 6·25전쟁은 국군에게 건군과정의 좌절을 극복하면서 뚜렷한 군사력 건설의 수준과 목표를 지향토록 했다. 혈맹에 기초한 한미동맹 위에서 형성된 전후의 연합방위태세는 국군의 현대화에 방향타가 됐다. 국군은 현대적 정규군으로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프로그램과 노력으로 ‘강병’의 길을 모색했다. 군은 결코 전쟁에서의 무수한 전우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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