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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8 09: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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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국군발달사-<20>6·25전쟁과 전사편찬
[군사기획] - 국군발달사
<20>6·25전쟁과 전사편찬
1950년 7월 ‘국방부 전사계’로 업무 수행

국가적으로 역사기록에 충실했던 우리 민족은 6·25전쟁 때에도 전쟁을 기록하고 편찬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신생 대한민국에 전사편찬기구가 있지는 않았지만, 1950년 4월 15일 서울대 교수로서 군문에 투신한 역사학자 이선근 박사(준장 예편)가 정훈국장으로 재직할 당시 전쟁 초부터 매일 전황을 개인 일기로 작성하던 데서 현대 전사의 기록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전황 일기의 작성은 그해 7월 초순 대전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국방부 전사계(戰史係)의 설치로 공적인 기록업무 형태로 수행됐다. 이선근 정훈국장은 전사 기록의 중요성을 조선조 임란 시 난중일기나 징비록이 그 어떤 군사적 위훈이나 정치적 업적보다 값지고 빛나는 역사적 의미를 지녔던 것처럼 기록이 한 국가의 문화와 야만을 가늠하는 관건이라고 설파했다.

국방부의 전사편찬업무는 유엔군의 반격작전 이후 전황이 호전되면서 더욱 체계를 갖췄다. 9·28 서울수복 이후, 전사편찬업무는 국가적으로나 국방부 차원에서 관심사가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 통수권자로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휘호를 보내 격려했고, 각국의 대사들도 자유수호의 동반자로서 서한을 보내 한국의 전사편찬 의지에 동참했다.

국방부는 50년 10월부터 이듬해인 51년 1월 사이에 전사편찬의 조직을 보강하고 그 이름을 ‘전사편찬회’로 명명했다. 근대 한국사 연구의 태두라 할 이병도 박사가 위원장을 맡았고, 전후 사학계를 이끌었던 김상기 교수를 비롯해 군 복무 중이던 소장학자 김원룡·한우근·전해종·정병학·민석홍·고병익·함홍근 등을 역원으로 뒀다.

바로 이 국방부 전사편찬회가 국가 차원의 공간사(official history)로서 ‘한국전란’의 편찬을 주관한 중심기관이었다. 한국전란지는 51년 10월 제1권 발간을 시작으로 56년 6월 제5권까지 발간됐는데, 매 권마다 1600부를 간행해 정부 차원에서 국내외 각계각층에 배포함으로써 6·25전쟁에 대한 실상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사편찬회의 임무는 한국전란지 5권의 편찬으로 종결되고, 이후 그 기능은 국방부 정훈국 내의 관련부서로 이관됐다. 다시 말해, 56년 전란지 편찬의 완결 시점에서 국방부 전사편찬회는 정훈국 내의 임무 정도로 남겨 두고 사실상 폐지된 것이다.

그러다가 1963년 6·25전쟁에 관한 전사편찬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국방부 내에 전사편찬기관 설치가 재검토됐다. 세계적으로 휴전 후에 미국을 위시해 한국참전 유엔국에서 참전사를 발간하는 한편, 북한이 59년 ‘조국해방전쟁사’를 발간해 세계 각국에 배포, 선전활동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이에 63년 말 김성은 국방부장관은 정책적 차원에서 ‘한국전쟁사’의 편찬을 최종 결심했다.

이로써 64년 8월 7일 국방부 기관으로 전사편찬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현실적으로 북한의 전쟁사 왜곡에 대응하는 공간사 편찬에서 시작해 전쟁의 체험을 보편화하고 역사화해 군사 발전에 기초로 삼고자 하는 목표를 가졌다.

그러나 점차 전사편찬의 폭과 깊이를 더하면서 국방정책 및 국방업무와 연계된 군사사 연구의 필요성이 더해져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는 92년 1월 국방군사연구소로 법인화했고, 2000년 9월 다시 국방부 직속의 군사사 전문기관인 군사편찬연구소로 재편됐다.


<백기인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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