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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30 09:2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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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6
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73>국군 방어계획과 북한군 남침공격계획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73>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 한강방어선 시찰
불타는 서울 바라보며 美지상군 투입 결심

맥아더 원수의 지시로 50년 6월 28일 한국에 설치된 미 극동군사령부 전방지휘소장(처치 준장)은 국군이 한강방어선 편성에 전력하고 있을 때 채병덕 육군총장을 만나 한강방어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작전에 관해 조언하는 한편, 미 지상군 투입 없이는 적을 38선 이북으로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이를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맥아더도 한국 전황의 중대성을 깊이 인식하고 한국전선 시찰을 결심했다. 서울 함락 이틀째인 29일 06시 10분 맥아더는 전용기(바탄)를 타고 한국으로 향했다. 그의 시찰에는 극동공군사령관 스트레이트메이어 중장, 참모장 알먼드 소장, 작전참모 라이트 소장,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 주일연합군사령부 민정국장 휘트니 준장, 도쿄특파원이 수행했다.

맥아더는 무스탕 전투기 4대의 엄호를 받으며 10시 39분 수원비행장에 도착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대사의 영접을 받은 맥아더는 비행장 근처에 위치한 처치 장군의 전방지휘소로 이동, 브리핑을 받았다. 처치 장군과 참모들은 인사·정보·작전·군수·공군사항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이때 맥아더는 참석한 채병덕 총장에게 이 사태 해결에 대해 질문하자, 그는 “200만 명의 남한 장정을 징집해 격퇴하겠다”고 답변했다.

브리핑이 끝난 후 맥아더는 포드 승용차, 수행원은 지프차로 한강변에 갔다. 맥아더가 탄 승용차에는 알먼드·라이트·시흥지구사령부 참모장(김종갑 대령·통역)이 탔고, 경호는 육군헌병사령관(송요찬 대령)과 공군헌병대장(김득룡 중령)이 맡았다. 지프차에는 맥아더의 참모와 외신기자가 탔다.맥아더는 국군 수도사단 제8연대 진지인 동양맥주공장 언덕에 올라 북한군 포병부대가 국군 방어진지에 사격하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20여 분가량 생각에 잠겨 연기가 피어오르는 서울 시가지와 시뻘겋게 물든 한강, 한강 남안의 밋밋한 대지를 눈여겨봤다. 그가 서 있는 언덕 바로 밑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후방으로 줄지어 가고 있는 국군을 봤다. 그는 이곳에서 미 지상군 전투부대를 투입해야만 한국을 공산군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전선 시찰을 마친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복귀해 이대통령·무초와 비밀회담을 가진 후, 18시 15분 일본으로 향했다.

기내에서 그는 워싱턴에 보고할 내용을 메모했다. 그는 “적의 진격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한국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전선을 유지하고 실지 회복을 위해 지상군을 투입해야 한다. 사활이 걸린 한국에 1개 연대전투단을 먼저 보내고 주일미군 2개 사단을 증강시켜 반격작전에 투입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히긴스 기자에게 “미군 2개 사단만 준다면 나는 한국을 지킬 수 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사단 규모의 미군 병력을 즉각 보내 줄 것을 요청하겠으나 나의 요청을 들어줄지는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맥아더는 22시 15분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맥아더의 전선 시찰 결과 보고서는 30일 새벽 미 국방부에 도착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선 시찰 결과 “한국군은 붕괴됐으며 한강방어선을 고수하고 실지를 회복하기 위해 미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고 보고했다.

워싱턴에서는 맥아더의 보고서를 검토한 후 한국에 지상군 파견을 결정했다. 이렇듯 맥아더의 적시 적절한 전선 시찰과 결과 보고는 김일성이 전쟁모의 과정에서 가장 우려했던 미군의 신속한 증원으로 연결돼 한국을 구원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북한에는 전혀 새로운 전쟁 국면을 맞게 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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