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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7 09: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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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74>주한 외국인과 외교사절의 피란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74>주한 외국인과 외교사절의 피란
전쟁발발하자 미국인 등 2000명 일본으로 철수

6·25전쟁 이전 미국은 주한 미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철수계획을 수립해 뒀다. 철수 책임은 주한미국대사관에 있었고, 수송지원은 미 극동군사령부에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무초 미국대사는 25일 23시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주한 외국인 철수를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맥아더 장군은 미 극동 공군 및 해군사령관에게 이를 지원토록 지시했다.

맥아더의 신속한 조치로 미군 수송기들은 일본에 있는 활주로를 출발했고, 해상의 미국 선박들은 전속력으로 한국의 항구로 항진했다. 주한 미국인 철수책임과 권한을 갖고 있던 무초 대사는 적의 공격으로 서울이 위협받자 영어방송을 통해 미국인에게 인천에 집합할 것을 지시했고, 26일 자정 무렵 이를 미 국무부에 보고했다. 미국인은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노르웨이 라인홀트(Reinholt) 호에 미국인 700명(부녀자·비전투 인원)을 태우고 일본 후쿠오카로 향했다.

이후 주한 외국인 철수는 미 공군기의 엄호 아래 극동공군에서 급파한 수송기로 김포·수원비행장을 통해 이뤄졌고, 나머지 외국인은 육로로 부산으로 이동한 후 그곳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났다. 6월 26일부터 29일간 미국인 1527명을 포함 2001명의 주한 외국인이 일본으로 피난갔다. 이 중 해상수송이 1078명이고, 공중수송이 923명이다.

특히 6·25때 서울에는 미국·자유중국 대사관, 영국·프랑스 공사관, 교황청 대표부, 외국 특파원·선교사가 있었다. 미국의 주한 외국인 철수계획에는 주한외교사절과 가족도 포함됐다. 전쟁 당시 미국 대사는 총각(49세)인 무초(Muccio)였고, 그는 49년 4월 20일 초대 대사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드럼라이트 참사관·노블 1등서기관·미국공보원장 스튜어트·무관 에드워스 육군대령·시퍼트 해군중령·2등서기관 코리·3등서기관 프랜더게스트·미군사고문단(KMAG)이 무초를 보좌했다.

전쟁 후 미국 대사관은 주한 외국인을 철수시킨 후 2개 반(무초대사·드럼라이트 반)으로 편성, 27일 서울을 떠났다. 자유중국 대사는 장개석 총통의 직계인 소육린(邵毓麟)으로 49년 7월 28일 이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대사 비서 겸 3등서기관 진충력·참사관 겸 총영사 허소창·2등서기관 겸 영사 숙몽공·무관 유업소 대령이 대사를 보좌했다.

대사관저는 김구 선생이 사용했던 경교장이다. 전쟁 발발 후 소육린은 6월 27일 무관·3등 서기관을 먼저 일본으로 보낸 다음, 그는 김포비행장을 통해 일본으로 떠났다. 자유중국 대사관은 7월 하순 대구에서 대사관 업무를 재개했다.영국공사 홀트(Holt)는 49년 2월 7일 공사 임무를 수행했다. 6·25 때 홀트는 북한군이 자신을 결코 겁줄 수 없고, 그는 영국 시민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며 잔류했다.

그는 서울에서 북한군 포로로 끌려갔다가 53년 4월 상병 포로 교환 때 석방됐다. 프랑스 대리공사 뻬르슈(Perche)도 대사관 직원과 가족들을 먼저 철수시켰으나 자신은 철수하지 않고 서울에 있다가 북한군 포로로 끌려갔으나 포로교환 때 석방됐다. 로마 바티칸 교황청의 주한대표 번(Byrne) 주교도 북한군 포로 신분이 돼 끌려갔다.

전쟁 후 그는 무초 미국대사의 철수 요청을 받고도 한국 국민과 재난을 같이하겠다며 서울에 있다가 끌려간 후 50년 11월 25일 북한에서 옥사(獄死)했다. 이 외에도 많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북한으로 납북됐다. 이렇듯 북한군은 외교관·종교인까지 전쟁포로 취급을 하며 학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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