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견했다. 영국은 1950년 6월 29일 극동함대 군함 8척을 한반도 서해로 보내 북한 해안을 봉쇄했다. 이후 영국은 홍콩 주둔의 영국27여단을 파병키로 결정하고, 50년 8월 말 한국전선에 전개했다. 영국27여단은 50년 9월에 호주군을 배속해 영연방27여단으로 개칭됐다가, 51년 4월 뉴질랜드·캐나다·인도군을 추가 배속해 영연방28여단이 됐다.
영국29여단은 본토에서 50년 11월 한국에 도착했다. 또 영국은 해병특공대(대대규모)를 파병, 북한군의 병참선과 해안선을 기습해 그들의 전력을 약화시켰고, 장진호 전투에서는 미 해병대와 함께 용맹을 떨쳤다.영국은 6·25전쟁 때 영연방1사단, 2개 보병여단(28여단·29여단)과 군함(항공모함 포함) 17척 등 5만6000명을 파병했다. 영국군은 유엔군 중 미군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독립된 사단체제를 유지하며 작전활동을 전개했다.
51년 7월 28일 창설된 영연방1사단은 유엔군 내의 또 다른 소(小)유엔군으로, 영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인도·벨기에·룩셈부르크의 7개국 군대로 편성된 연합군이었다. 전쟁 동안 영국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1기병사단에 배속됐으나 북진 때는 미24사단에 배속, 평북 정주·박천까지 진격했다. 이후 영국군은 중공군 춘계공세 시 적성·가평에서 격전을 치르며 중공군에 타격을 가했다.
특히 설마리 전투에서 보인 영국29여단 글로스터대대의 용맹성은 ‘해(太陽)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영광’의 실체를 보여준 전투로 세인의 뇌리에 각인됐다.중공군 춘계공세는 51년 4월 22일 중서부전선을 목표로 개시됐다. 중조연합사는 51년 4월 초 개최된 전략회의에서 “장차 유엔군은 38선을 확보하고도 계속 원산∼평양선을 점령, 정치·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진남포·원산·통천에 상륙작전을 할 것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유엔군의 공세작전을 조기에 분쇄하고 그 주력을 격멸 후 서울을 점령해 주도권을 장악할 것”을 결정했다.중공군은 3개 병단·11개 군단·36개 사단, 북한군은 3개 군단·10개 사단을 동원했다. 중공군은 먼저 취약한 중부전선의 국군6사단을 공격해 돌파구를 형성, 유엔군을 동서로 차단한 데 이어, 서부전선의 국군1사단과 영국군29여단을 공격해 의정부로 우회 기동함으로써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서울 북방에서 이를 섬멸하고자 했다.
영국군29여단(미3사단에 배속)은 중공군 19병단(주공)이 의정부로 우회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될 임진강 남쪽 적성 일대에 배치돼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글로스터대대는 감악산 줄기의 설마리(雪馬里) 235고지(후에 ‘글로스터고지’로 명명)에서 3일간 고립된 채 전선을 사수함으로써 의정부로 진출해 유엔군 퇴로를 차단하려는 중공군의 기도를 분쇄했다.
글로스터대대는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많은 희생을 감내하며 끝까지 ‘대영제국 군인’의 명예를 지켜 냈다. 이는 영국군 상하 간의 엄격한 규율과 주어진 임무를 끝까지 완수하려는 전통에서 비롯됐다. 1674년 창설돼 워털루에서 나폴레옹 군대를 꺾고 승리를 쟁취한 글로스터대대는 44번째로 참전한 한국전에서도 ‘항복보다는 최후까지의 결전’을 택해 그 명성을 드높였다.
이렇듯 글로스터대대의 혈전은 자칫 ‘제2의 1·4후퇴’로 연결될 뻔한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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