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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자
2008.01.21 10: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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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52>6·25전쟁과 총력전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52>6·25전쟁과 총력전
동서고금 전쟁양상 망라한‘국제전쟁’

▲전쟁책임과 명칭

6·25전쟁은 내전(內戰)이 아니라 세계 열강 25개국이 참전한 세계 전쟁이다. 6·25는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돼 ‘국제전쟁’으로 종결됐다. 북한군의 1950년 6월 25일 전면 남침은 김일성·스탈린·모택동의 사전 치밀한 공모와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개시됐고, 전쟁 전개 과정에서 김일성은 전쟁 전반에 걸쳐 스탈린과 모택동으로부터 ‘훈수’와 직접적인 군사지원을 받으며 전쟁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냉전시대 전쟁 발발의 직접 책임이 있는 이들 모두는 그 책임을 부인하거나 무시했고, 심지어 일부 친공산계 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동조하며 그럴듯한 학설로 이를 포장해 선동했다. 하지만 90년대 소련에서 공개된 문서와 전쟁에 참전한 북한군 고위 장성급 간부의 잇따른 증언에 의해 북한군의 남침이 사실로 확인됐다.

최근 중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을 부인하지 않음으로써 전쟁의 책임, 즉 ‘누가 먼저 총을 쐈는가’ 하는 문제는 북한이 그 진범(眞犯)으로 지목되면서 해결됐다. 이로써 냉전 이데올로기시대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학자들이 전쟁 원인과 책임론을 놓고 끈질기게 다퉜던 해묵은 논쟁은 완전 해소됐다.

그렇지만 6·25전쟁의 잔재는 치유되지 않은 상흔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전쟁 명칭이 바로 그것이다. 전쟁 명칭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는 6·25전쟁을 원칙으로 하되, 유엔 참전국을 고려해 한국전쟁을 혼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레닌의 ‘정의의 전쟁’에 기초해 ‘미국으로부터 조선을 해방한다는 의미로 조국해방전쟁’이라 하고, 일본에서는 과거 조선의 국명을 붙여 조선전쟁이라 한다.

영어권에서는 ‘Korean War’로 통일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조선전쟁과 항미원조전쟁이라 한다. 이는 중공군 참전 이전까지는 ‘내전적 의미로 조선전쟁이라 하고, 중공군이 개입한 이후부터는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는 의미로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한다. 이는 모두 자국의 국익과 이해 관계를 고려해서다.

▲온 국민 참여한 총력전

6·25전쟁은 국제전쟁이며 총력전으로 동서고금에 나타난 전쟁 양상을 모두 망라하고 있다. 전쟁 초기 홍천 말고개의 육탄용사 활약상은 고대 서양에서 스파르타의 300명 결사대가 테르모필레 고개에서 페르시아 수십만 대군과 싸웠던 결사항전과 유사하며, 제1차 세계대전의 베르덩 전투는 낙동강의 다부동 전투와 비슷하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의 상징인 노르망디 상륙작전, ?蝸?르크 철수작전, 연합군의 융단폭격과 대공습, 항공모함 작전, 대공습 작전은 6·25때 실시한 인천·원산상륙작전, 장사동·흥남철수 작전, 왜관지역 융단폭격, 동해와 서해상의 항공모함 작전, 유엔공군의 북한지역 대공습과 흡사하다. 25개국의 참전과 대규모 군사작전, 전쟁수행 양상은 2차대전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특히 한국에게서 6·25는 온 국민이 참여한 총력전이었다. 국군을 비롯해 15세부터 17세까지의 소년지원병, 학생신분의 어린 학도의용군, 미군에 배속된 카투사, 지게부대인 노무자, 40여 개에 달하는 각종 유격대, 준군사 단체인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 제2국민역으로 구성된 국민방위군·경찰·여군·향토자위대가 조국이 처한 위기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선(死線)을 수없이 넘나들다가 최후에는 그들의 고귀한 ‘뼈와 살 그리고 피’를 멍들고 찢겨진 이 산하 위에 뿌리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갈구한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8.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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