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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5 19: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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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7>미국의 38선 돌파 논의와 이승만의 북진명령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37>미국의 38선 돌파 논의와 이승만의 북진명령
李대통령, 유엔 만류 불구 ‘즉각 북진’ 결단


▲워싱턴의 38선 돌파 논의

6·25전쟁 초기 미국의 전쟁목표는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복이었다. 합참의장(브래들리)도 맥아더 청문회에서 미국의 군사 목표는 침략을 격퇴하고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는 것이라고 밝혔다. 국무부의 공식 입장도 미국과 유엔군은 한국에서 현상유지 회복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1950년 7월 초 미군 참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선이 붕괴되는 상황에서 워싱턴에서는 ‘38선 돌파와 북진’ 문제가 논의되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국무부 동북아국장 앨리슨(Allison)이 대통령의 대한(對韓) 정책에 포함될 정책 사항을 상관인 극동담당차관보(러스크)에게 보낸 각서 내용에서였다.

앨리슨은 각서에서 “인위적인 분단이 38선에 존속하고 있는 한 한국에는 어떠한 지속적인 평화와 안전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있다면 만주와 시베리아 국경에까지 곧바로 돌진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러스크는 앨리슨의 입장에 동의했다.

또 맥아더 장군도 미 육군참모총장(콜린스)과 공군참모총장(반덴버그)이 7월 13일 도쿄를 방문했을 때 그들과의 전략회의에서 북한군을 섬멸하기 위해 그들을 격퇴할 뿐만 아니라 38선을 넘어 추격할 의도가 있다고 했다. 트루먼 대통령도 7월 17일 만약 대한민국이 유엔군에 의해 재탈환될 경우에 대비해 38선 돌파문제에 대한 대안을 수립할 것을 국가안보회의(NSC)에 지시했다.

9월 11일 국가안보회의는 “유엔군이 북한군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내거나 북한군을 격멸하기 위해 38선 이북에서 군사작전을 위한 합법적인 토대를 마련해야 하며, 합참은 가능한 한 맥아더가 북한 점령을 계획하도록 전권을 줘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 합참은 9월 27일 맥아더에게 북한군 격멸을 위해 38선 북쪽에서 지상작전을 포함, 상륙작전과 공수작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맥아더는 그 다음날 38선 이북에서의 유엔군 작전에 대한 세부계획을 합참에 보고했고, 합참은 이를 승인했다. 이에 맥아더는 북한군 최고사령관(김일성)에게 두 번에 걸쳐 항복을 권고했으나 반응이 없자 10월 9일 유엔군에 북진명령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군 단독 북진명령

6·25때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목표는 북진통일이었다. 이는 유엔군과 함께 북한의 남침을 응징함과 동시에 미국의 목표이자 유엔의 목표이며 자신의 목표인 ‘자주·독립된 통일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대통령은 50년 7월 10일 한미연합군이 힘겨운 지연작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이제 38선은 자연스럽게 해소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7월 13일 그는 “북한의 공격으로 과거의 경계는 완전히 사라졌으며 분단된 한국에서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이때는 38도선 돌파문제가 워싱턴에서 논의되는 시점이었다.인천상륙작전 후 동해안의 국군3사단이 38선에 도달하자 이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유엔군사령부는 유엔 결의가 없으니 38선을 넘지 말라고 했다. 그럼에도 정총장은 1군단이 있는 강릉으로 가서 김백일 군단장에게 대통령의 뜻을 전하고 함께 3사단 23연대 지역에 도착해 무전을 통해 3대대장에게 38선 돌파명령을 내렸다. 이때가 50년 10월 1일 오전 11시 25분이었다. 이렇듯 38선 돌파는 이대통령의 결단에 의해 이뤄졌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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