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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05 19: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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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관리자
제목 : [국방일보]다시보는 6·25 -<38>김일성의 중·소 파병요청과 맥아더의 항복 권고
다시보는 6·25 - [군사기획]
<38>김일성의 중·소 파병요청과 맥아더의 항복 권고
北, 전세 불리하자 다급해져


▲북한의 중·소 파병 요청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 수뇌부는 전세가 불리하게 전개되자 다급해졌다. 북한은 9월 29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김일성·박헌영 공동명의로 작성된 파병요청서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북한은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침공하게 될 때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음을 밝히면서, 소련군 개입의 불가피성과 여의치 않을 경우 중공 또는 다른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지원해 줄 것을 소련에 요청했다.

스탈린은 10월 1일 주중 소련대사를 통해 모택동에게 중공군 5~6개 사단을 의용군 형태로 북한에 파병해 지원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또 북한은 중공에게도 별도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북한의 내무상(박일우)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 단동을 방문, 그곳에 주둔해 있던 중공군 13병단의 고위지휘관들에게 조선노동당 및 북한 정부 대표 자격으로 파병을 정식 요청했다.

이어 유엔군의 38선 돌파로 전황이 더욱 급박해지자 이번에는 부수상 겸 외무상(박헌영)이 10월 1일 북한대표단을 이끌고 모택동에게 중공군 파견을 요청하는 김일성 서신을 전달했다. 특히 이날 김일성은 평양에서 ‘중공 건국1주년기념 연회’ 행사장에 나타나 중공대사(예지량)와 정무참찬(시성문)을 만나 “중공이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군대를 파견해 북한군의 작전을 지원해 줄 것”을 간청했다.

▲유엔군사령관의 항복 권고

쫓기는 북한과 달리 유엔군은 여유가 있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빼앗긴 지 정확히 3개월 만인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해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반환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쳐 북한군 최고사령관(김일성)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시 연합국이 독일과 일본에 적용했던 무조건항복에 의한 전쟁 종결방식이었다.

10월 1일 방송을 통해 실시된 맥아더의 김일성에 대한 항복권고는 파멸 직전에 있는 북한의 전쟁 능력과 북한군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가 항복을 권고했던 것은 유엔이 결의했던 “최소한의 인명 손실과 재산 파괴”를 고려해서다. 그는 김일성에게 북한군의 무장해제와 적대행위 중지, 유엔군 포로와 비전투원 억류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10월 2일 북한군최고사령부 명의로 “북한군은 조직성 있게 북쪽의 새로운 진지로 철수하면서 계속적으로 저항하라”며 이를 무시하고 끝까지 저항하겠다는 행태를 보였다.그동안 미국에서 38선 돌파가 결정되고 유엔 총회가 10월 7일 한반도 통일을 의미하는 ‘통한(統韓) 결의안’ 통과로 유엔군의 북진은 합법적이 됐다.

맥아더는 10월 9일 김일성에게 다시 항복을 권고했다. 이때 동해안의 국군3사단과 수도사단은 원산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무기를 버리고 적대행위를 중지’할 것을 최후 통첩했다. 또한 유엔의 통일한국 결의안에 따라 “통일·독립된 민주주의 한국 정부를 수립함에 있어 유엔에 전적으로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반드시 북한 정부의 이름으로 회답해야 하며 이의 회답이 없을 경우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 장군은 김일성으로부터 이에 대한 회답이 없자 이날 유엔군에 북진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북한의 지원을 요청받은 중공과 통일한국을 위해 북진하는 유엔군 간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방일보-200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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